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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용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입력 2018-02-09 05:05:01
로비 다멜린이 세상을 뜬 아들 사진이 담긴 인쇄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인이던 그의 아들은 스물여덟 살일 때 팔레스타인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다멜린은 비보를 접하자마자 “내 아들 이름으로 복수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부키 제공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마리나 칸타쿠지노 지음/김희정 옮김/부키/308쪽/1만3800원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제목만 본다면 이렇게 넘겨짚기 쉽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우려먹는 고리타분한 신간이 또 출간됐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나는 너를…’은 용서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다. 용서가 품고 있는 “커다란 전환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용서를 무조건 부추기거나 강권하진 않는다.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부터 살펴보자.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2003년 무참한 학대를 당했거나 전쟁이나 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복수가 아닌 용서의 길을 택한 사례들을 하나씩 그러모았다. 그리고 이듬해 런던에서 이들의 사연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행사는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저자는 용서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용서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단체 ‘용서 프로젝트(The Forgiveness Project)’를 만들었다. ‘나는 너를…’은 이 단체에 답지한 기구한 사연 중 각별한 의미를 띠는 사례들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용서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46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는 1인칭 시점에서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씩 풀어썼다. 이렇게 글을 쓴 건 “1인칭 증언이 훨씬 더 현실감 있고 밀접하게 느껴진다”고 판단해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용서를 통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찾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증언집처럼 느껴진다.

책에 담긴 각양각색의 인생 스토리는 적잖은 울림을 선사한다. 가령 서맨사 롤러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10대 소녀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면 그의 삶이 얼마나 뒤틀렸을지는 불문가지다. “세상을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 삶은 생기를 잃었고, 술에 취한 듯 혼미했다. …엄마를 빼앗아 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견뎌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롤러는 서른두 살 되던 해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수감된 교도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차례 뇌졸중으로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했다. 에이즈에도 감염된 상태였다.

롤러는 “뼈대만 남은”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심판받은 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충격적이고 참혹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리게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거듭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말했고, 용서한다고도 말했다. …10분 사이에 나는 내 아버지를 되찾았고, 그 방에서 나오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엄청난 중압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용서란 그 행동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용서하는 것이다.”

롤러의 사연 외에도 눈길을 끄는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다. 로비 다멜린은 2002년 아들을 잃었다. 그의 아들은 이스라엘 군인이었는데, 팔레스타인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참척(慘慽)의 고통은 상당했다. 하지만 다멜린은 “화해의 길”을 택했다. 저격수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저격수가 보내온 답장엔 참회의 내용이 없었다. 자신의 행위는 정당했다고, 다멜린의 아들 역시 살인자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멜린은 마음이 아팠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또한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리 가족의 삶이 그가 저지른 일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들 사례를 통해 ‘용서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전한다. 하지만 용서가 모든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주장을 내놓진 않는다. 그는 “용서는 그 결과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옳다고 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누군가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면 사람들이 택하는 건 둘 중 하나다. 복수를 꿈꾸거나 현실에 체념하거나. 하지만 이 책은 복수와 체념, 두 갈래의 길 사이에 ‘용서’라는 샛길이 존재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저자가 용서의 색깔을 흰색과 검정색 중간에 있는 회색이라고 규정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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