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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전쟁 참상 눈 감은 유엔, 그 속 들여다보니

입력 2018-02-23 05:10:01
2016년 8월 시리아 정부군이 알레포를 공습했을 때 피투성이로 구조된 소년 옴란 다크니시의 모습은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세계평화를 수호한다는 유엔은 당시 시리아에서 벌어진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알레포미디어센터(AMC)가 촬영한 동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엔은 인류 지성이 만든 최고의 제도적 발명품입니다. 유엔은 전쟁의 참화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 탄생했고, 지난 70여년간 인류 앞에 제기되는 도전들에 쉼 없이 맞서 왔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역할과 기여는 갈수록 더욱 커질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말이 아예 틀린 얘긴 아닐 것이다. 유엔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제도적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언젠가부터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지구촌의 ‘파워 랭킹’을 매긴다면 유엔은 아마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보다 훨씬 낮은 순위에 랭크될 것이다.

신간 ‘유엔을 말하다’에는 유엔이 무기력해진 이유를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스위스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84)가 썼다. 한국 독자에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로 유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 국내에 2007년 번역·출간된 ‘왜 세계의…’는 한국에서만 40만부 넘게 팔린 현대의 고전으로 부조리한 세상의 얼개를 심플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었다.

저자의 전작들을 읽은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간명하고 통렬한 문장으로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건 유엔 내부에서 벌어지는 복마전이다. 유엔이 내건 숭고한 가치를 좀먹는 집단에 대한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건 투기자본인 벌처펀드로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자본가들. 이들은 잇속을 차리려고 우파 정치인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는다.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늘어놓은 뒤 이렇게 적었다.

“벌처펀드는 부자는 힘이 세고 국가는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왜곡된 방식으로 뚜렷이 보여준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은 각국에 지지자와 하수인을 두고 있다. …(이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황제나 교황이나 왕도 가져본 적 없는 권력을 쥐고 있다.”

최강국 미국을 향한 서슬 퍼런 비판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은 유엔을 제멋대로 주무를 때가 많다. 저자는 미국 국무부나 중앙정보국(CIA)가 유엔 직원들을 “조심스럽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감시하고 있으며, “미국은 제국주의적 목표에 따라 유엔을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이라는 조직의 실체를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소상하게 살핀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책장 곳곳에는 저자가 헨리 키신저, 빌리 브란트, 살바도르 아옌데 등 20세기 세계사의 거인들과 주고받은 대화도 고명처럼 등장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저자가 전하는 유엔의 개혁 방안이다. 해법은 단순하다. ‘거부권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 어떤 전쟁에도 개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시리아 내전에 유엔이 개입하지 않은 건 러시아의 거부권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폭격했을 때나 수단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땐 각각 미국과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유엔이 어떤 무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부권 제도’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

저자가 내놓는 해법은 1997∼2006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재임 당시 제시한 다음과 같은 개혁안으로 갈음할 수 있다. ①반인도적 범죄와 관련되는 모든 갈등 상황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②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는 모든 국가가 교대로 맡는다.

물론 이 개혁안은 과거 상임이사국 5개국이 모두 거절하면서 수포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의 시민들이 어깨를 겯고 압박한다면 개혁안이 언젠가 관철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실성 없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감안했는지 책의 끄트머리에 마하트마 간디가 남긴 명언을 소개하는데, 간디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당신을 무시한다. 이어서는 그들이 당신들을 비웃는다. 이어서 그들은 당신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은 승리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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