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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두런두런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듯… 한문단편 187편 모아

입력 2018-02-23 05:10:01


조선시대 후반 한문단편의 전형을 보여주는 187편이 실린 책이 나왔다. 책은 1973년 한국학·한문학의 거장 고(故) 이우성 교수와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처음 엮어낸 것을 45년 만에 다시 출간한 것이다.

책에는 연구진이 국내외를 다니며 수많은 자료를 발굴해낸 성과가 담겨 있다. 임 명예교수는 책을 다시 엮으면서 제자들과 5년 동안 독회를 진행했고 번역에 젊은 감각을 더했다. 당시 작자미상으로 실었던 작품들의 출처를 고증하면서 대부분 작품의 작자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한국학적 성과만 놓고 보면 책이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3쪽도 안 되는 초단편이 많고, 길어도 20쪽을 넘기지 않아 읽는 데 부담이 없다. 게다가 할머니가 손주에게 두런두런 옛날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담은 번역이라 빠르고 쉽게 읽힌다.

이런 식이다. “구리개의 한 약국에 어느 날 웬 노(老) 학구가 불쑥 들어왔다. 허름한 옷에 짚신을 신고 용모가 향원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약국 주인이 이상해서 물었다.”(동현 약국) “때마침 7월 보름을 맞아 밤은 삼경이 이미 지났는데 궂은비가 막 개고 밝은 달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나왔다. 동이가 취한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것은 패랭이를 쓰고 베 홑옷을 걸치고 허리에 전대를 두르고 손에 채찍을 쥐었는데, 신장이 8척이요 걸음걸이는 허뚱거렸으며 언어는 매우 공손하고 용모는 심히 기괴했다.”(염동이) 소리 내어 읽으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격동하던 당시의 시대상이 재현되는 것도 흥미롭다. ‘부부각방’은 10년 동안 자식을 낳지 않기 위해 부부관계를 하지 않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부의 이야기다. 대를 잇는 게 중요했던 시대였는데도 부(富)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작중 “우리 부부가 두 궁상끼리 만나 동침하게 되면 자연 자식을 낳을 것 아니겠어요? (중략) 그 씀씀이를 무엇으로 다 감당하겠어요?”라는 대목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출산을 꺼리는 지금의 모습과도 겹친다.

조선 후기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풍성한 자료가 될 법하다. 총 네 권이 나왔는데 1∼3권은 일반 독자가 읽기 쉽도록 번역한 글로 엮었다. 4권에는 연구자들을 위해 원문을 실었다. 연암 박지원의 덜 알려진 작품 11편도 담겨 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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