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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애정 담겨

입력 2018-03-07 14:21:06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오른쪽)가 작가 안톤 체호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는 두 사람을 포함해 막심 고리키가 만났던 사람들 얘기가 재미있는 단편처럼 펼쳐진다. 민음사 제공




“인간은 희망으로 들뜬 불안한 삶을 원치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 아래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면 족합니다. …공산주의가 뭘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1868∼1936)가 산문집 ‘가난한 사람들’에서 한 말이다. 고리키는 열렬한 공산주의 혁명 지지자였지만 민중들이 품고 있던 회의에 대해서도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 책은 고리키가 1924년 독일에서 펴낸 단행본 ‘일기로부터의 단상. 회고’에서 추린 원고 22편에 같은 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했을 때 쓴 추도사를 묶은 것이다. 이 추도사가 국내에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일기로부터의 단상. 회고’ 영역본은 80년대 국내에 소개된 적 있지만 오래 전 절판됐다. 이번 책은 러시아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필명 막심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최대’를 뜻하는 막심과 ‘맛이 쓰다’는 의미의 고리키를 합한 것이다. 그는 이 필명처럼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의지로 평생 글을 썼다. 무산계급 출신인 고리키는 접시닦이로 일하다 요리사의 도움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23세 때 러시아 전역을 도보로 여행하면서 민중의 생생한 이야기를 채집했다. 여기 실린 글들도 주로 그가 직접 만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다. 제목을 보고 관심 가는 글부터 읽으면 좋을 듯하다.

‘영혼을 시험하는 자들’을 보자. 온천장 때밀이 프로호로프가 등장한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던 그는 이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어째서 나는 운이 좋은 걸까? 하나님은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비열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도둑질을 하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자신의 행운이 계속되는지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재판관 앞에 나가 자기가 저지른 일을 낱낱이 고백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운을 신의 무관심 탓으로 돌리던 그에게 판사는 “자네 앞에 있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수도원”이라고 한다.

책에는 인간의 운명과 나약함을 묵상하는 기이하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 간병인 양치기 시계공 이발사 노동자 사형집행인 야경꾼…. 고리키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러시아에서는 심지어 바보들조차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리석고, 게으름뱅이조차 무언가 쓸 만한 자기만의 재능을 갖고 있다”는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가 교류했던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와 안톤 체호프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어느 날 체호프는 고리키에게 “왜 톨스토이 선생이 당신을 그토록 변덕스레 대하는지 아십니까? 질투가 나서 그러는 겁니다. …톨스토이는 당신을 두고 ‘그 친구는 염탐꾼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며 폭소를 터트린다. 고리키는 톨스토이에 대해 “그의 곁에 있으면 늘 경탄하게 되고, 결코 싫증을 느낄 새가 없으나 그를 자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인물평을 남긴다.

말미에 수록된 40쪽 분량의 추도사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었다’는 혁명가 레닌의 사상을 반추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상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레닌은 베토벤 ‘열정 소나타’를 자주 듣고 톨스토이 ‘부활’을 읽었다. 고리키는 레닌 집권 2년 후 망명길에 올라야 했지만 혁명 동지로서 우애와 존중심을 잃지 않는다. 고리키는 레닌이 “단순한 심장에서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 또는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진실한” 웃음을 지었다고 회고한다. 산문집에 담긴 러시아 특유의 감수성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인간을 진리”로 믿었던 고리키 사상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고리키는 결국 고결한 삶의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에게 어떤 경의를 표한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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