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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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김영석] 석유부자 국가의 배고픈 국민

입력 2018-03-07 14:21:06


은행 앞에서 한 노인이 숨졌다. 연금을 받기 위해 밤을 새우며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가 받으려던 연금은 우리나라 돈으로1600원이었다. 지폐 1000여장으로 핸드백을 만드는 부부가 있다. 개당 10∼15달러 가격에 하루 20개 안팎을 판다. 이전에 이들 부부의 한 달 수입이 2.5달러였으니, 성공적인(?) 전업이다. 동물원에선 사료를 구하지 못해 다른 동물을 도살해 먹이로 준다. 지난해 국민 100명 중 75명의 체중이 평균 약 9㎏이나 빠졌다고 한다. ‘작은 베네치아’로 불리며 한때 남미 최대의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최근 풍경이다.

베네수엘라는 지난달 공식 환율을 99.6% 평가절하했다. 10만 볼리바르의 가치가 30달러다. 실제 암시장에선 단돈 2.5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이마저도 암시장에서 달러 위조용 종이로 유통된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율은 4300%에 달했다. 올해는 1만3000%까지 치솟을 것으로 국제통화기금은 전망하고 있다. 국민의 기본적인 삶조차 장담할 수 없는 남미의 병자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의 나라다. 원유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1위다. 수출의 80%가 석유로, 정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물량 대부분은 미국을 향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 덕분에 호황을 누렸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그는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 퍼주기식 복지정책을 펼쳤다. 2014년 유가가 폭락하면서 석유는 ‘독’이 됐다. 석유 외에 다른 분야는 전혀 성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난해 8월 베네수엘라와의 모든 신규 금융 거래를 금지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차베스에 이어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집권 연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데도 대선을 앞당겼다. 사법 당국까지 동원해 야권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또 지난달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인 ‘페트로’를 발행했다. 자국의 원유 가치와 연동되도록 설계했다. 현재로선 희대의 사기극이 될 확률이 높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선거를 치르기 위한 꼼수로 보인다. 국제사회의 경고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그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했던 독재자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로선 인기영합주의 복지정책의 위험성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영석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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