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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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

입력 2018-03-08 17:50:01


함께 동화 쓰는 동지들의 모임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었다. 밥은 맛있었고, 술기운이 아니어도 대화는 왁자했다. 6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우리가 그날 특히 신나서 몰두한 소재는, 초등학교(일부는 국민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듯 귀신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귀신 체험이 있었다. 도깨비불, 가위눌림, 귀신 목격, 그림자 습격, 소리와 냄새와 촉감 체험 등등. 어린 시절 그 일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에 대한 토로는, 자라서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로 이어졌다. 종교적 방식으로, 과학적 납득으로, 건강 회복으로 등등. 그리고 한 사람이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사람 기운이 훨씬 세답니다. 정신 차리고 쫓아내면 그까짓 귀신, 못 당한대요.

미투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다. 몇 년에서 몇 십 년 동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느냐,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머리와 몸만이 아니다. 정신과 혼이 무너진다. 아픔, 두려움, 수치, 모멸, 자책, 절망,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강력한 공포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철저히 무력해진다. 그런 상태를 가해자와 잠재 가해자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사실 그 공포는 귀신에 대한 공포처럼 불합리하다. 그런 공포는 있어서는 안 된다. 생기더라도 즉시 떨쳐내야 한다. 이제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모두 도와야 할 일이다. 그 오랜 세월 얼마나 참담했을지 알아주고 위로해야 할 일이다. 그까짓 귀신, 우리 사람들보다 훨씬 약하다, 벌벌 떨며 주저앉고 꽁무니를 빼는 꼴 보이지 않았느냐, 이런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리고 약해서 고스란히 떠안았던 공포를 떨쳐낼 만큼 자라고 강해진 거라고 하면 위안이 될까. 그들만의 성장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성장이 함께 가야 더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가볍게 떠들썩했던 귀신 이야기 뒤끝이 이렇게 무거워진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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