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독일 뮌헨대학교 의과대학. 한 교수의 학년말 마지막 강의를 듣던 동양인 유학생의 눈이 아연 반짝거렸다.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 질환 연구’라니. 예술을 그런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의 감동이 50여년 뒤 책 한 권으로 이어졌다.
신간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을 쓴 이성낙(80) 가천대 명예총장을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그때 같이 유학했던 친구로부터 “똑같이 수업 들었는데, 너만 이런 책을 내다니…”라고 축하 인사를 받은 사실을 전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초상화에 빠진 피부과 의사’가 됐다. 75년 귀국 후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대 교수, 가천대 총장 등을 거쳤다. 의사로 일하면서 박물관 전시뿐 아니라 개인 소장품까지 초상화를 보러 다녔고, 그렇게 모은 관련 문헌 및 사진 자료가 불어났다. 2008년 은퇴한 뒤 그 자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미술 애호가 모임에서 만난 명지대 유홍준 교수가 ‘결자해지’라며 박사 학위를 새로 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72세에 덜컥 명지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생이 된 그가 2014년 쓴 박사 논문이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다. 피부과 전문의가 아니었다면 쓸 수 없는 ‘통섭의 학문’의 좋은 사례다. 미술사 연구 대상이었던 조선시대 초상화 500여점을 가지고 피부 병변을 연구해 사회상을 분석한 것이다.
“초상화를 보니까 이런 흔적이 왜 한국에만 있나 궁금했어요. 초상화 한 점 한 점에서 곰보 사마귀 여드름 황달 천연두 등 병명을 찾을 때의 희열을 잊을 수 없네요.”
숨기고 싶은 ‘흠집’조차 화가가 그리도록 왕과 사대부들이 담담하게 묵인한 결과다. 심지어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에도 이마의 흠 자국이 그대로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천연두가 창궐했는데도 조선의 초상화에만 그 자국이 보입니다. 조선 시대 초상화야말로 ‘정직성’으로 대표 되는 선비 정신, 시대정신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이번 책은 그 학위 논문을 대중서로 정리해 낸 것이다. 논문의 딱딱함을 피하기 위해 진료 경험, 개인사 등을 버무렸다. 그는 “어떤 나라에도 없는 정신문화 유산, 자랑거리를 일반인도 알았으면 해서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