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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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자-구자창] 전직 대법관들의 추락

입력 2018-11-26 04:05:02


‘농단(壟斷)’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제 뜻은 ‘깎아세운 듯 높은 언덕’이다. 위정자·법관들이 권력의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도취돼 국민이 위임한 권한의 의미를 망각한 사태가 벌어질 때 주로 사용된다.

검찰이 수사 중인 ‘사법농단’ 의혹 정점에 있는 전(前) 사법부 수뇌부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취임 초기 신뢰받는 사법부를 거듭 강조했다. 2011년 9월 취임사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재판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공정성을 확인할 때에 비로소 전폭적인 신뢰 확보가 가능하다”고 했다. 지난해 9월 퇴임사에선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신뢰’라는 단어를 취임사에서 8번, 퇴임사에서 9번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권력 최정점에서 스스로 밝혔던 소임을 망각했다는 정황이 검찰 수사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사법행정의 그늘에 숨어 있던 재판개입·법관사찰 의혹은 부하 법관들의 진술과 물증 등으로 피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퇴임 1년 만에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다음 달 초로 예상되는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소환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2014년 2월 행정처장에 취임하면서 “사법 정책을 수립·추진함에 있어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자유로운 토론을 통한 비판과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사법행정의 수장으로서 소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의미였다. 고영한 전 처장도 2012년 8월 대법관에 취임하면서 “제 생각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살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초유의 상황에서도 이들은 “부적절한 면이 있지만 죄가 안 된다”(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업무는 (법원행정처 담당)실장 책임 하에 하는 것”(박 전 처장)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23∼24일 소환된 고 전 처장 역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관으로 살아온 오랜 경력을 자기 잘못을 모면하는 ‘법기술’에 동원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이들이 내건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양 전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떤 부당한 영향도 받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그의 역량은 결국 어디에 부어졌는지 자신은 알고 있을까.

구자창 사회부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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