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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국가부도의 기억

입력 2018-11-30 04:05:01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경제사령탑에 발탁한 래리 커들러 국가경제위원장은 오판의 대명사로 통한다. 지난 3월 그가 임명되자 워싱턴포스트는 “생존하는 그 누구보다 경제 전망이 크게 틀렸던 인물”이라고 썼다. 결정적 사건은 평론가로 활동하던 2007년 12월에 있었다. 잡지에 칼럼을 쓰면서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 비관론자들은 얼굴에 달걀을 맞게 될 것이다. 미국 경제에 불황이 닥쳐올 일은 없다. 부시 붐(부시 정부의 경제 호황)은 건재하다. 특히 부동산 시장에서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온다”고 했다. 당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업체 2곳이 파산한 뒤였다. 경제가 수렁에 빠지느냐 반등하느냐의 방향성이 모두의 관심사였는데 그는 완벽하게 틀렸다. 리먼브러더스 같은 초대형 투자은행이 잇따라 쓰러지며 2008년은 금융위기의 해가 됐다.

커들러는 지난주 백악관 취재진 앞에서 다시 경제를 전망했다. 10월 증시 대폭락 이후 불안한 장세가 계속돼 위기론이 불거진 터였다. 이번에도 단언했다. “불황이 다가온다는 기괴한 글들을 읽었다. 난센스다. 불황은 너무 멀리 있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이 보도되자 사람들은 더 불황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경제 흐름을 취재하던 월간지 애틀랜틱 기자에게 “향후 6개월간 불황은 없을 것”이라 전망해준 애널리스트는 인터뷰를 마친 뒤 기자한테 추가로 이메일을 보냈다. “지금 뉴스를 보니 커들러가 불황은 없다고 했네요.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자들은 금융위기 시간표를 정리할 때 2007년 12월을 불황이 공식화된 시점으로 꼽는다. 예고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지만 커들러가 그랬듯이 바로 곁에 와 있는 위기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많다. 합리적 대처법은 경고음에 예민해지는 것뿐이다. 20년 전 갑작스럽게 외환위기를 겪은 뒤로 한국인의 위기 감수성은 꽤 높아졌다. 뉴스의 홍수에도 경제위기 경고음은 스쳐 지나지 않고 귀에 찾아와 박힌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교수는 최근 “미국 주택시장의 탄력이 떨어지고 있다. 2006년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2006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배경이었던 부동산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때다.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부동산 과열과 급증하는 그림자금융의 중국 경제가 2008년의 미국과 비슷하게 곪아가고 있다”면서 중국발 경제위기를 경고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안전띠를 매야 할 때”란 표현을 썼다. 2008년 위기는 유례없는 양적완화로 대응했지만 다음 금융위기가 발생할 경우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책적 여유가 몹시 제한돼 있다는 뜻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들은 수치보다 느낌으로 경제를 진단한다. 통계만큼 명료하진 않아도 숫자가 말하지 않는 분위기를 읽는 데는 더 유용하다. 최근 만난 지인들의 느낌은 이랬다. “요즘 기업체에 통역하러 다녀온 이들이 하나같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통역을 원하는 내용이나 기업에서 풍기던 활력 같은 게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단다. 번역도 온통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발주하는 일감뿐이다.”(통·번역 에이전시 대표) “우리 회사는 원자재를 취급하니 해외거래가 많은데 한국만 유독 상황이 안 좋다. 그건 정말 확실하다. 투자? 어떤 경영자도 이런 분위기에선 절대 못한다.”(대기업 부장) “종업원을 몇 명 내보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이 장사를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음식점 주인)

모두 20년 전 IMF 체제를 경험한 이들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는 얘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었다. 마침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이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린다면 위기를 감지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이미 우리 곁에 와 버린 것이 아니기를, 우리에게 대처할 시간과 지혜가 남아 있기를 바랄 수밖에….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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