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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박재찬] 수면 경제 시대의 단상

입력 2018-12-03 04:05:01


‘졸리면 제발! 쉬었다 가세요.’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마주치는 문구에 종종 졸음쉼터로 핸들을 꺾는다. 예전보다 빈도가 잦다. 검색해보니 고속도로 졸음쉼터는 2011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전국에 이미 200개 넘게 들어서 있고, 더 만들어진다고 한다.

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다. 또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 지인들도 비슷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 안팎이다. OECD 회원국 평균(8시간)보다 2시간이나 부족하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올 상반기 성인 남녀(19~59세) 1000명에게 물었더니 46.6%가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지난해 실시한 같은 조사 결과(35.3%)보다 10% 포인트 넘게 늘었다.

얼마 전 100만부를 돌파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소설 속 김지영의 어머니는 남자 형제들의 학비를 보태려고 밤잠을 포기하면서까지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1960, 70년대 억척스럽게 일했던 우리 부모 세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면, 잠자는 것쯤이야 기꺼이 포기하는 게 마땅한 일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입시생들에게 주문처럼 돌던 ‘4당5락’(4시간 자면 합격, 5시간 자면 낙방)도 비슷한 맥락이다. 미래를 위해 적게 자고 공부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지금도 이런 이유들로 밤잠 못 이루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작금의 우리는 또 다른 불면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 세대가 나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오늘보다는 미래를 위해 잠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불면 키워드는 ‘나, 지금, 여기’ 정도가 될 것이다. 하루 종일 손안에 두고 꼼지락거리는 스마트폰 탓이 크다. 또 눈도 떼지 못할 정도로 재밌게 만들어진 TV프로에, 미드에, 식욕 돋우는 ‘먹방’에 야식까지 시켜먹느라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불금’이라는 말은 으레 자정쯤은 가뿐하게 넘겨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자고 싶어도 잠 못 드는 불면증과는 또 다른 현상이다.

중·고등학생들이라고 다를까. 얼마 전 고향 친구들과 나누는 단톡방에선 중학생 딸을 둔 친구가 이런 글을 남겼다. ‘요새 중딩들은 밤새 폰질(카카오톡 등 SNS)하면서 친구들끼리 새벽에 생존 확인 한다던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족이나 결핍은 시장을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 갤럽에 따르면 65세 이상 미국인 3명 가운데 1명은 수면 도움을 위해 약이나 보조제를 복용하고 있다. 2020년이 되면 미국인의 수면 관련 지출은 52억 달러(5조83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이 분야에도 일찌감치 장이 섰다. 숙면용 침구, 수면보조 기기, 수면 카페 시장이 팽창하고 있다. 잠과 경제학을 합친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수면 경제)’ 연구도 활발하다.

산업계에선 숙면이 생산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한 결혼정보업체는 지난 10월부터 밤잠을 잘 잔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일주일 동안 매일 6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면 주당 1000엔(약 1만원) 상당의 포인트를 준다. 침대에 부착된 센서로 수면 시간을 체크한다고 한다. 1년에 최대 6만4000엔(약 64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 직원들은 모은 포인트로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밤잠을 포기한 지 반세기 만에, 밤새 즐기느라 잠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회사에선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잠 좀 푹 자라고 보채기 시작하고. 바야흐로 잠이라도 잘 자야 경제가 사는 세상이 되어가는 건가.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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