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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한국교회를 위한 소소한 제언

입력 2018-12-05 04:05:01


연말이면 거리는 기독교 문화로 꽉 찬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가 나타나고 빨간 냄비 사이로 캐럴이 흐른다. 자연스러운 겨울풍경이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가 이뤄낸 공적이다. 이런 고양된 분위기에서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 소소한 제언 몇 가지를 드리고 싶다. 미션 페이퍼에서 25년, 미션 스쿨에서 6년간 일하며 느낀 성찰의 결과물로 받아주면 좋겠다.

먼저 예배당 장의자에 관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터라 사람들이 무심하지만 이 의자가 상징하는 바 적지 않다. 은연중에 신자의 주체성과 개별성을 억누르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배당은 흔히 제단을 중심으로 극장식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장의자의 잘 정돈된 배열이 스펙터클 효과를 줄지는 몰라도 회중은 엉덩이 하나 붙일 정도의 공간을 배정받음으로써 구경꾼 지위에 머물게 한다. 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림으로 교리를 전하던 시기가 아닌데도 그렇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런 위계적 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는 최근에 짓는 교회에서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건축과 인테리어에서 많은 변화를 꾀하면서도 장의자를 그대로 배치하고 있는 것은 제단 쪽의 선택이라고 본다. 일부 교회에서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이 횡행하는 데는 이런 공간이 조장했을 수 있다. 무겁고 움직이기 어려운 장의자보다 가변적인 개별의자를 연결하는 편이 낫다. 핀란드에 가보니 교회와 주민센터가 한 건물을 쓰면서 필요에 따라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효용을 높이고 있었다. 예배 없는 시간에 교육과 친교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인들의 감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런 모임은 어떤가. 총재와 대표회장 아래에 상임고문 10명, 고문 7명, 상임회장 10명, 운영회장 공동회장이 각 1명, 상임위원장 10명, 실무위원장 11명, 운영위원장 10명. 또 다른 단체는 총재와 대표회장, 상임회장, 상임총재, 운영총재, 5명의 실무총재, 10명의 수석회장, 12명의 공동회장을 두고 있다. 총재라는 호칭은 김영삼(YS) 이후 정치권에서 사라졌고, 한국은행 총재도 은행장으로 바꾸자는 마당에 교회가 총재 직함을 선호한다는 것은 권위적인 문화를 선호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자리가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책임을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매관매직 혹은 허례허식으로 오해하기 쉽다. 섬기는 것이 아닌 군림하는 모습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조직도를 봐서는 누가 무슨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단체나 조직을 만들었다면 얼굴이나 직함을 배분하는 공명심에서 벗어나 일을 중심으로 겸손한 구조로 바꿔야 한다.

마지막은 전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신문사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다가 대학의 화요채플로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요즘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못해 매주 고통을 겪고 있다. 오랫동안 ‘전능하사…’로 시작되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끝나는 개역개정판을 읽다가 ‘나는 전능하신…’에서 ‘영생을 믿습니다’로 마무리하는 새번역판을 읽으려니 단어는 물론 운율까지 달라 혼란스럽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다. 교회가 갈라져도 신경은 지켜져야 한다. 사도신경은 가톨릭과 정교회도 매주 고백하는 교회일치의 유효한 수단이기도 하다. 같은 점은 늘리고 다른 점은 줄이는 게 일치의 기술이다.

찬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어떤가. 모어가 지은 가사 가운데 ‘Alles schl ft’가 ‘All is calm’으로 영역된 것까지는 좋은데, 한국에 와서는 ‘어둠에 묻힌 밤’(개신교)과 ‘만상이 잠든 때’(가톨릭)로 달라졌다.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합창하는 ‘고향의 봄’이 나라마다 다르게 불려서야 되겠는가. 작은 틈새를 제때 메우지 않고 방치하면 나중에 감당이 안 된다. 디테일이 본질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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