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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남도영] ‘빚투’라는 여론 심판대

입력 2018-12-11 04:05:01


지난달 하순부터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이슈는 ‘빚투’였다. 빚투는 성폭행 고발을 의미하는 ‘미투(#MeToo)’에서 빌려온 용어다. “나도 연예인 부모에게 돈을 떼였다” 정도로 의역되겠다. 래퍼 마이크로닷이 시작이었다. 지난달 19일 인터넷에서는 20여년 전 마이크로닷의 부모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글이 확산됐다. 몇 년 전부터 나돌던 얘기였는데, 마이크로닷이 인기를 얻자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이크로닷 소속사는 “사실무근이며 명예훼손으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응했다. 그러나 의혹은 확산됐고 경찰은 마이크로닷 부모를 인터폴에 적색수배 요청했다. 마이크로닷은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빚투가 시작되자 다른 연예인들도 잇달아 소환되기 시작했다. 래퍼 도끼, 가수 비와 휘인과 티파니, 개그우먼 이영자, 영화배우 이병헌과 차예련이 차례로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법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대전제다. 여론의 법정은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한다. 여론의 심판대에 오른 사람은 익명의 다수가 가하는 감정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즉자적인 비판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마이크로닷과 도끼는 잘못된 대응으로 문제를 키웠다. 도끼는 자신의 어머니가 중학교 동창의 돈 1000여만원을 갚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오자 “내 한 달 밥값밖에 안 되는 돈…”이라고 대응했다가 융단폭격을 맞았다. 빚이 아닌 자세의 문제였다. 이영자나 비는 차분한 대응으로 위기를 헤쳐 갔다. ‘확인 결과 이미 과거의 일이고, 법적으로 처리된 사안이며,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병헌과 차예련은 부모의 빚을 꾸준히 갚았다는 점이 재조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괜찮은 연예인’ 대열에 합류했다. 빚투 와중에 그늘진 가족사가 공개된 연예인도 있었다.

빚투 논쟁의 법률적 결론은 비교적 명확하다. 대한민국은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으며 부모의 빚을 자식이 대신 갚을 의무는 없다. 도의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법적 책임은 묻지 못한다는 게 다수 법률가의 해석이다.

대부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빚투 대전’에 참전했다. 왜일까. 이들도 상식적인 근거가 있다. 법적인 의무는 없더라도 돈과 인기를 얻은 연예인이라면 부모나 가족의 빚 정도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갚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미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현상을 ‘분노한 다수가 성공한 소수를 공격하는 구조’로 설명했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 쌓여가는 대중의 분노와 좌절이 유명인의 실수와 결함을 공격하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빚투 현상을 양극화의 분노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여론의 심판대’에 소환되는 일반인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양진호로 대표되는 일그러진 회사 간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아파트 경비원에게 선물한 아파트 주민, 식당과 카페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엄마….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했던 행동과 발언, 댓글로 갑자기 여론 법정에 소환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두가 연결되고, 그래서 모두가 모두의 일을 알게 되는(알고 싶지 않지만) 정보 과잉 시대의 현상이다. 사실 한 연예인 부모의 20년 전 빚은 우리 대부분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과거라면 몰랐을 타인의 삶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연결’의 무서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공개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나의 생각 없는 행동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문자 사진 영상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여론의 심판대’에 오를 수 있고, 여론의 심판대에는 공소시효도 없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타인을 배려하고 말과 행동에 신중한 ‘괜찮은 사람’이 돼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남도영 디지털뉴스센터장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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