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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에서] 북·미 사이에 낀 ‘핵 중재 외교’

입력 2018-12-15 04:05:01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핵 중재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마리 말을 동시에 타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말이다. 성향과 목표가 다른 두 말을 같은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반전시켜 지금까지 비핵화 협상을 진행시킨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라는 평가가 담겨 있다.

이제 한국의 중재 하에 ‘삼자(三者)가 한번 잘 해보자’는 단계는 끝나고 비핵화 협상의 열쇠를 쥔 미국과 북한 간 밀당(밀고 당기기) 국면으로 넘어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이 각론 협상이 문제다. 성질 까다로운 두 말을 같은 쪽으로 몰고 가기가 한계에 달한 징후가 뚜렷해졌다.

북한은 미사일·핵실험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등의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이 이에 상응하는 제재 해제를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미국은 북한이 약속한 동창리 엔진시험장 및 미사일 발사대 폐기와 영변 핵시설 폐기 일정 제시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당초 북한에 요구한 북한 내 전체 핵물질과 핵 프로그램 리스트 제출은 한발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북한 간 본 협상의 정체가 길어지면서 이젠 중재자를 자처해온 한국에 불똥이 튀고 있다.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11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북한이 문재인정부에 화가 많이 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 리택건 부위원장을 비롯해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면서 “이들은 9·19 평양선언 이후 (남한 정부가) 별다른 행동이 없으니 왜 이렇게 답답하냐, 결단력이 없냐 이런 이야기를 아주 거침없이 했다”고 전했다. 김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설득해 제재 완화라든가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을 하면서 남북 관계도 국제 제재와 관계없이 조금 강화하는 것으로 (북한은) 인식했나보다”고 덧붙였다.

반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미국은 ‘남북 관계가 너무 앞서가면 북·미 관계에서 미국이 북한을 설득하고 북한의 입장을 바꾸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한·미 관계에 불협화음은 없다’고 강조한 문 대통령의 입장과는 다른 주장이다.

미국은 북한의 길어지는 침묵에 상당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문 특보는 “미국 측에서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10번, 20번 넘게 전화를 했지만 평양으로부터 답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미국 국무부가 11일 북한 내 ‘2인자’로 꼽히는 최룡해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포함한 핵심 인사 3명을 추가 제재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경고’의 성격이 짙다.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지만 ‘판’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북한이 제재 해제가 늦어지는데 반발해 핵·미사일 도발 국면으로 회귀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로 인한 추가 경제 제재를 북한이 견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의 하원 장악으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더욱 북한이 실질적인 핵 폐기에 들어갔다는 ‘증거’가 긴요해졌다. 최소한 영변 핵시설 사찰과 동창리 기지 등의 전문가 참관 하 폐기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는데 제재 해제 카드를 북한에 넘겨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벽에 부닥친 것은 맞지만 성공 가능성이 아주 낮은 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재선을 위해 ‘북한 문제 해결’이라는 전리품이 절실하며, 김 위원장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병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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