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혜윰노트-홍인혜] 사계절을 사랑하세요?

입력 2018-12-14 04:05:01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배워왔다. 그리고 그 뚜렷한 기후 변화는 이 땅의 장점이라고 들어왔다. 확실히 계절의 변화는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겨우내 얼었던 나무들이 녹아내리며 가지 끝마다 영롱한 것이 맺히는 봄, 생명의 리듬으로 만물이 춤추는 여름, 숲이 미련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놓아버리는 가을, 모든 윤곽들이 하얀 어깨동무를 하는 겨울. 우리는 계절의 섬세한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약동하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단순화되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의 사철은 기승전결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소설 같았건만, 언젠가부터 디테일이 모두 소거된 채 폭염 한철과 혹한 한철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재작년 열대야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우리 집 에어컨이 고장 났던 적이 있다. 바로 AS를 요청했으나 예약이 빼곡했는지 수리기사의 방문이 늦어졌고 꽤 오랜 시간 켜지지 않는 에어컨과 함께 밤을 보내야 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켜고, 얼린 생수병을 껴안고 잠을 청해보려 애썼지만 더위가 고통스러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이 너무 더워도 서러워 눈물이 날 수 있구나.

더위만큼 추위도 모질기 짝이 없다. 전 국민의 옷장에 긴 누빔점퍼가 하나씩 들어가 있을 정도로 요즘 추위도 만만치가 않다. 바로 오늘도 다급한 출근길 미처 머리를 못 말리고 길을 나섰더니 머리칼 끝이 뾰족하게 얼어붙어 달리는 내 이마와 뺨을 툭툭 때렸다. 그렇다면 이 고난의 계절들을 버틸 휴게소 같은 봄과 가을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찰나와도 같은 그 계절들은 황사나 미세먼지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문득 이런 의심이 생겼다. 뚜렷한 기후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산다는 것, 과연 아름다운 일일까. 영하 저 끝자락에서 영상 저 꼭대기까지 너울지는 기온의 역동 속에서 살아가느라 너무 많은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풍기, 에어컨은 물론 보일러, 전기장판, 가습기, 공기청정기까지 갖춰둬야 그나마 계절을 견딜 수 있다. 사철을 대비해 다양한 옷을 구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그것들을 보관할 장소까지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계절에 대한 불만사항을 곱씹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서 사계절을 없애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승낙할 것인가. 흔히들 이상적인 날씨로 꼽는 지중해 어느 곳의 계절로 평생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 그런데 막상 계절이 통일된다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살며 다양한 만남과 마주한다. 때로는 내 인생에 나타날 것 같지 않았던, 낯설고 소중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의 마음은 이런 기대로 부푼다. 이 사람과 보내는 봄은 어떤 향기를 갖고 있을까. 이 사람과 함께 날 여름은 어떤 온도를 갖고 있을까. 이 사람과 함께 걸을 가을은 어떤 색깔을 하고 있을까. 이 사람과 맞이할 겨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만약 나에게서 계절이 사라진다면 이 낭만적인 기대감들도 사라질 게 아닌가.

어쩌면 이 생각들은 평생 좋은 기후의 품에 안겨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협소한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온화한 계절 속에서만 꾸준히 사는 사람들도 저마다 변화무쌍한 1년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사계절은 이런 의미인 것 같다. 소중한 사람과 강변에서 맥주 캔을 부딪치며 감상하는 벚꽃, 8월의 뙤약볕에 어깨가 그을면서도 멈출 수 없는 물장구,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거리를 함께 걷는 경험, ‘오늘 첫눈 온대’ 하고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한때는 사계절의 존재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외워왔고, 한때는 그 주입식 교육이 불만스러워 세모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또 한 시절을 살아온 지금의 결론은 이렇다. 시간이 흘러감을 몸으로 인지하게 해주는 모든 변화들은 존재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함께 겪어낼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그에 대한 낭만적 예감을 가지고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속을 걸어가고 있다고.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