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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보수적 교회가 새해에 해야 할 ‘선한 일’

입력 2018-12-26 00:05:02


18세기 말 영국에서는 어린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내몰렸다. 아이들은 하루 12~18시간을 일했다. 산업혁명 이후 일자리가 부족해지면서 가난한 가정은 아이들을 공장에 보냈다. 공장에서는 이들을 환영했다. 임금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굴뚝 청소를 많이 했다. 몸집이 작아 굴뚝을 드나들기가 쉬워 자본가들이 선호했다. 굴뚝 청소는 ‘구빈원’이라는 고아원 아이들이 많이 했는데, 못 먹었기 때문에 몸집도 작아 굴뚝 청소에 더 용이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장은 처우가 나빴다. 아이들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밥을 줬다. 식사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굴뚝에서 잠들어 질식하거나 타죽는 아이들도 많았다.

1802년 영국에서 제정된 아동 노동자 보호법은 아동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 조건을 시정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후 개정돼 1833년 공장법이 제정됐다. 목면 양모 견직물 공장의 9세 미만 아동 고용금지, 13세 미만 아동 노동시간을 1일 8시간 제한, 아동·연소자 야간노동 금지, 공장 아동에 대한 교육 의무화, 공장 감독관 설치 등의 내용을 담았다. 1847년에는 여성과 연소자의 1일 10시간 이하 노동을 규정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통해 목소리를 낸 결과이지만 당시 토리당 개혁파 의원들의 노력도 빛났다. 특히 ‘10시간 노동’은 토리당 의원 중 박애주의자로 불린 앤서니 애슐리 쿠퍼(1801~1885)가 주도했다. 제7대 샤프츠베리 백작으로 불린 그는 정신질환자와 공장·제재소 아동 근로자, 굴뚝 청소부 아이들, 탄광의 여성들과 빈민가 아이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42년 광산법까지 발의하면서 석탄 광산의 여성과 아동 고용 금지를 규정했다.

쿠퍼 백작은 당시 복음주의 성공회 지도자였다. 영국성서공회 대표를 역임했고 영국 복음주의동맹 회장을 지냈다. 그의 전기를 쓴 조지나 바티스콤은 “인간 불행의 정도를 줄이기 위해, 혹은 인간 행복의 총량을 늘이기 위해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은 결코 없다. 금세기 위대한 자선운동은 대부분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됐다”고 평했다.

영국성서공회는 클라팜 파와도 관련이 깊다. 클라팜 파는 런던 인근의 클라팜 마을에 살면서 클라팜 교구 교회에 속해있던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일컫는다. 정신적 지주는 윌리엄 윌버포스였다. 이들은 전도와 함께 사회활동에도 힘썼다. 노예 매매 폐지(1807)와 노예 해방(1820)은 클라팜 파의 공로였다. 이 외에 형벌제도와 의회법을 개혁하고 성서공회와 교회선교회를 설립했다.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대부 격인 존 스토트 목사는 클라팜 파의 윗세대에는 존 웨슬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웨슬리가 전파한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감옥제도가 인간다워졌으며 공장과 광산의 환경이 개선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노동조합이 생겨난 것은 웨슬리의 기독교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결과였다고 스토트 목사는 그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밝혔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와 서울 지하철 구의역 사고에서 숨진 ‘김군들’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들은 위험의 외주화라는 불의한 경제 구조 속에서 컨베이어 벨트와 스크린도어라는 ‘굴뚝’ 속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이 불의한 구조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는 한국교회의 ‘클라팜 파’와 ‘쿠퍼’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윌버포스를 추앙하는 보수적 교회가 불의한 사회구조 개선에 침묵하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난센스에 가깝다.

왜 기독교의 직업과 영성 분야를 거론할 때 크리스천 기업가나 (사무직) 직장인만 있고 노동자는 없을까. 왜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관심은 진보적 교회만의 몫이어야 할까. 왜 구약성경 예언서들이 전하는 날선 메시지는 소위 개혁교회 강단에서는 잘 들을 수 없는 걸까.

예수님은 성령과 능력을 받으시고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 아쉽게도 보수적 교회의 ‘착한 일’은 그 분야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선교와 봉사가 주 분야이고 최근엔 동성애나 차별금지법 반대 등으로 흐르는 모양새다. 새해에는 더 많은 선한 일을 찾아주시길 바란다. 감사하게도 윌버포스와 쿠퍼, 그리고 웨슬리의 선례가 있다.

신상목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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