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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지난 정권과 다른 게 뭔가’

입력 2019-01-01 04:05:01


전현직 공직자의 잇단 폭로는 사실 여부보다 ‘전 정권과 똑같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데 심각함이 있다
선한 의지의 정치 기술만으론 실망·냉소 불러… 정권 최대 약점인 책임성과 명확성을 높여 책임도 지고 결과도 내야 한다


희망을 얘기해야 할 새해 첫날부터 이런 표현을 들이대는 건 참 안타깝다. “노무현 대통령만큼만 해라.” 요즘 이런저런 자리에서 국내 정치 얘기만 나오면 오르내리는 말이란다. 말속엔 늘 뼈가 있다. 이 표현에는 실망과 함께 냉소까지 배어 있다. 나랏일이 좀 잘못되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이유불문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후반부로 갈수록 보수 야권은 거의 모든 현안이 꼬일 때마다 그렇게 공격했다. 당시 정권 입장에서 보면 ‘현안 발생-지지율 하락-정권 탓 공세-지지율 더 하락’이라는 악순환에 빠졌다. 결국 노무현 정권은 악순환의 덫을 탈출하지 못했고, 스스로 폐족이라 선언했다.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그렇게 노무현을 공격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젠 정반대의 시각으로 노무현을 다시 불러온다. 그만큼만 하라고…. 대통령 지지율이 반 토막 가까이 되자 나타난 기막힌 역설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냉소를 섞어 비유함으로써 현 정권을 공격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 핵심들에게는 상당히 자극적으로 들리겠다. 지금 분위기라면 지지율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아마 반등하더라도 30%대를 찍고 다시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진보의 정치는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단순히 오르내리는 지지율 변화의 과정인가. 수구 기득권층의 총공세 때문인가. 정권 초기에는 그런 변명과 주장이 통할 수 있었다. 집권 3년차인 지금은 아니다. 전 정권 탓이라는 말은 이젠 꺼내지도 못한다. 어영부영 그 말로 넘어갈 시기는 지났다. 지지율이 40% 밑으로 떨어진다면 ‘이게 나라냐’에 동의하며 지지를 보내줬던 중도 보수 성향의 시민들이 등을 돌렸거나, 대부분 돌릴 채비를 갖췄다고 보는 게 옳다. 그건 국정 운영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6급과 기획재정부 5급 사무관 퇴직자의 폭로는 그 내용보다 발생 자체를 심각하게 봐야 한다. 폭로 내용에 대한 반대 주장도 있고,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반박도 있으며, 이젠 정치 한복판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아직은 정확한 인과관계를 판단하기 이르다. 문서 유출이나 공직기강 훼손 등은 레임덕 현상으로 간주된다. 임기 말 현상이 벌써 일어났다는 건 정권 내부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뚜렷한 정황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번 정권도 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로 모아진다. 그 사람들이 비위를 저질렀든, 직권을 남용했든, 법을 위반했든, 그것은 그것대로 다루면 된다. 문제는 그들의 눈에 비친 정권 내부의 일들이다. 그건 현 정권이 그토록 청산하고자 부르짖었던 적폐 행위였다. 청와대와 여당은 부인하지만 그런 정황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사실 현 정권이 정의와 공정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지 확산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 정권과의 차별을 최우선 가치로 뒀으니 지지를 보내줬던 이들의 실망감이나 배신감도 더 클 것이다.

몇몇 전현직 공직자의 일탈 행위를 일반화하지 말라고 반박할 수는 있겠다. 그렇지 않다. 정권 초기만 해도 공직사회, 특히 하부 구조에서는 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제법 컸었다. 지난 정권 공직사회에서는 불공정과 비정상 사례가 많았고, 끼리끼리 해먹는 구조가 공고화됐었다고 보는 내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공직사회는 복지부동과 냉소가 만연될 조짐마저 보인다. 처음엔 올바른 방향과 일부 감동적 인사로 지지를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법이나 시스템은 개선된 게 없고 온갖 군데 헤집어놓기만 했지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나라냐’로 잡은 정권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공직사회에서 ‘전 정권과 다른 게 뭐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면 지지율 회복은 어렵다.

현 정권 핵심들의 가장 큰 약점은 책임성과 명확성, 구체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더 이상 정의니 공정이니 좋은 뜻만 잔뜩 갖고 있는 표현으로 감성에 호소해봐야 실망과 냉소만 돌아온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명확히 책임지는 이들이 정권 내부엔 없다. 그러니 모든 게 대통령 책임으로 가기 마련이다. 착하게 보이고 감성적인 정치 기술에 익숙해 있으니 명확하고 구체적인 매듭도 별로 없다. 그러면 무능으로 전락한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시작해도 성과 없는 구호만 판친다면 그 정치는 이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은 진보 정치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이른바 ‘꼴통보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적절한 토양을 제공한다. 이 정권은 그런 기로에 서 있다. 그토록 타파하고자 했던 것을 다시 살아오게 만들다니, 이 또한 기막힌 역설 아닌가. 진보 정치에 묻는다. 지난 정권과 다른 게 뭔가.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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