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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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서윤경]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입력 2019-01-03 04:05:01


‘할많하않’. 급식을 먹는 나이인 초·중·고교생이 주로 사용하는 ‘급식체’다. 어떠한 사건, 상황 등을 접했을 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할 가치가 없음을 표현하는 이 단어를 풀어 쓰자면 이렇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그들이 그랬다. 억울함을 대신 호소해 줘도 나서지 않았다. 이 정도 억울함이라면 분기탱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공감은 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는 바로 그 말 ‘할많하않’이었다.

그들 세상을 처음 알게 된 건 2000년이다. 당시 벤처붐이 일던 때였다. 서울 강남역 테헤란로부터 역삼역, 선릉역을 거쳐 삼성역까지 건물 곳곳엔 그들이 세운 작은 회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회사가 작으니 직함도 간단했다. IT 개발자거나 회사 설립자였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모바일 세상으로 IT 영역이 확장되던 2012년 또 다시 이들을 만났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상전벽해였다. 일부 기업은 대기업 반열에 올랐고 회사만 가면 쉽게 만나던 설립자들은 이제 만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됐다. 물론 대부분의 회사들은 사라졌다.

달라지지 않은 건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발자들은 여전히 ‘할많하않’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물론 다른 건 있었다. 2000년엔 일이 너무 많고 잘 나가니 말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을 잘못 놀렸다간 일자리를 뺏길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호소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구체적인 호소의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기자의 호기심을 키웠던 것 같다. 어렵게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틈틈이 기사를 썼지만 어디서도 반응이 없었다. 최근 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역시 무반응이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사자인 IT 노동자들의 무반응이었다.

민주노총 산하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 관계자가 한 마디로 이유를 알려줬다. ‘눈팅’.‘할많하않’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조금은 유행이 지난 신조어 ‘눈팅’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사를 많이 퍼가는 경우는 없었어요. 그런데 댓글은 없어요.” 노조 관계자가 SNS 등에 관련 기사를 올려놓지만 이들은 ‘눈팅’만 한다는 거다.

눈팅의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알아서다. IT 세상에 그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만의 세계가 워낙 좁은 데다 IT 전문가들이니 정체를 밝히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거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일자리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 탓에 폐 잘라낸 개발자로 인터뷰에 나섰던 양도수씨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선 기사를 공유하며 난리가 났는데 정작 밖으로는 표출하지 못한다고 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할많하않’은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 대중의 관심 내지는 호기심을 받지 못한다는 거다. 그리고 현실이 됐다.

지난달 11일 태안화력발전소의 하청 노동자인 김용균씨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 하루 전, 산업은행에서 IT 외주를 맡은 모 차장은 화장실에서 사망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발견됐다. 이틀 뒤 청와대 게시판엔 IT 외주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김용균씨의 죽음은 위험에 내몰리는 하청 노동자를 대변했고 최근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반해 산업은행 외주 노동자의 사망 소식은 사라졌다. 같은 공간에서 일한 동료들은 기자의 질문에 침묵했다.

본인이 할 말을 다 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게 뻔해 아예 언급을 포기하는 것, 바로 ‘할많하않’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할많하않’을 하고 있는 IT 노동자들에게 신조어로 감히 제안을 해 본다. “여러분은 ‘화이트 불편러’가 될 생각이 없으신가요?” 화이트 불편러란 사회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정의롭게 나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공감을 이끌어내고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을 뜻한다.

서윤경 온라인뉴스부 차장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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