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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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이도경] 교육부 블랙리스트 취재기

입력 2019-01-07 04:05:01


“보수 정권 9년간 굶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으니 한 자리 달라.”

문재인정부 언저리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아우성이라는 소문은 대선 끝나고 석 달가량 지났을 무렵부터 들려왔다. 30년 기자생활을 뒤로하고 퇴직을 앞둔 ‘마당발’ 기자가 혀를 차며 먼저 귀띔했다. 여의도를 기웃거리는 전직 공무원에 이어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는 현직 관료도 같은 말을 했다. 알고 지내던 국회 비서관도 이런 소식을 전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김상곤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임명장을 받은 직후부터 교육부를 ‘어공’(어쩌다 공무원) 천국으로 만들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신, 진보 교수단체 출신,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 타이틀을 하나씩 달고 교육부 본부와 유관기관에 하나둘 입성했다. 교육부 직원들은 ‘역대급 어공 러시’라고 평했다. 얼마나 많았던지 교육부 인사 업무를 총괄하는 당시 운영지원과장조차 “몇 명이나 외부에서 들어왔는지 정확히 파악 못하고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블랙리스트나 살생부로 부를 수 있는 괴문서 작성이 시도됐다. 새 정부 출범 135일째인 2017년 9월 21일이었다. 점심 식사 끝나고 시간 좀 내 달라며 찾아온 교육부의 젊은 공직자는 기자 팔을 잡아 구석으로 끌더니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떨어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운영지원과 인사팀장이 오전에 사무관과 서기관들을 집합시키더니 어떤 리스트 작성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리스트 양식을 나눠주고는 빈칸을 채워오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운영지원과는 교육부 인사 업무를 총괄하는 차관 직속 조직이다.

리스트는 산하기관 임원의 공적과 과실, 남은 임기, 전문성을 평하고 유임할 인물과 교체할 인물을 찍어 보고토록 했다. 당시 차관에게 구두 보고한 뒤 진행됐다는 게 운영지원과 전언이라고 했다. 리스트에 312명이 거론됐다. 산하기관 기관장 22명, 상임이사 7명, 상임감사 18명, 비상임이사 255명, 비상임감사 10명이다. 국립대학병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장학재단 한국사학진흥재단 국가평생교육진흥원 등이 이름을 올렸다.

산하기관을 여럿 관장하는 부서 국장을 두드렸다. 그 국장은 고민하고 있었다. ‘블랙리스트 작성 시도 아닌가’란 기자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3명째 만났을 때 팩트 체크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인사팀장을 만났다. 그는 웃으며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뗐다. ‘알고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외부에 나가 있던 운영지원과장이 전화상으로 실토했다. 직속상관이 털어놓자 인사팀장은 “너무 당황해 그랬다.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사과 수용 조건으로 리스트 양식을 달라고 요구했다. 옥신각신 끝에 리스트 양식을 보여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운영지원과에 살생부 작성 지시를 내린 인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교육부 사람들은 청와대 실세와 학맥 등으로 끈이 닿아 있다고 소문이 무성했던 한 운동권 출신 어공을 지목했다. 이런 ‘간 큰’ 지시를 내릴 인물은 교육부 늘공(늘 공무원) 중엔 없다고도 했다. 교육부는 정부세종청사 14동에 있다. 바로 옆 15동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박근혜정부 때 작성된 문화계 블랙리스트 때문에 곡소리가 나고 있었다.

교육부의 후속 조치는 신속했다. 리스트 작성 지시는 취소했고 리스트 양식은 파기했다. 기사 대응 논리도 만들었다. “산하기관 현황은 조직 인사관리 차원에서 통상적으로 파악해 왔다. 오해 소지가 있어 작성을 중지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교육부 산하기관 블랙리스트는 미수(일단 미수라고 해두자. 제보자 색출 작업이 진행되자 다들 입을 닫았다. 이후 리스트 작성 재시도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았다)에 그쳤다.

친정부 인사들의 일자리를 무리하게 챙겨주려다 사달이 난 것일까. 아니면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침소봉대일까. 김태우 수사관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신재민 전 사무관의 민간기업 인사 개입 의혹은 아직 주장만 있고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제보자의 신뢰도를 깎아내려 무마하는 고전적인 방법이 통할 단계는 지났다. 그래서 인신공격은 모두에게 무익하다. 또한 관료들은 지위고하, 전·현직을 막론하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 때로는 권력자를 위해 때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두 눈 부릅뜨지 않으면 현혹되기 쉽다.

이도경 사회부 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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