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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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김준동] 또 한 해를 시작하며

입력 2019-01-10 04:05:01


내 고향은 두메산골이다. 오죽했으면 ‘골짜기 안’이라는 뜻으로 ‘골안(고란)’이라고 지었을까. 지금도 마을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 한 차례에 불과하다. 폭설이라도 쏟아지면 버스는 좁고 가파른 긴 마을 어귀를 넘지 못한다. 울퉁불퉁한 자갈이 삐죽삐죽 솟아있어 더 그렇다. 유일한 외부 통로가 끊기는 셈이다.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던 곳’이라는 정지용의 ‘향수’가 저절로 읊어질 정도다. 어찌 그리 흡사하게 묘사했는지 이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 북적대던 마을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는 못했다. 도심으로 하나둘씩 떠나 폐가(廢家)가 넘쳐난다. 여기저기 지붕의 한쪽은 허물어져 입을 벌렸고 추억으로 쌓아올린 돌담은 흉물스럽게 무너졌다. 화롯불을 다독거리며 넘쳐났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구수한 옛이야기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다른 마을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고향 가는 길목의 이웃 마을은 예외다. 지난해 히트를 친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 때문이다. 의병의 작전회의 장소이자 대갓집 애기씨 고애신이 미군 장교 신분의 유진 초이와 ‘러브(Love)’를 시작한 촬영지로 알려지면서부터다.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연정(戀情)을 마음속에 숨기던 애기씨가 ‘러브’를 활짝 피웠듯 적막하기 그지없던 이곳이 관광객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는 것이다. 영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정겨운 고향 그림에 또 하나의 추억이 아늑하게 서려 들었다고나 할까.

또 한 해가 시작됐다.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고향을 찾았다. 연중 거르지 않는 일이지만 해마다 정겹다. 도회지에서 자식 농사를 마무리 짓고 고향으로 내려가신 부모님을 뵙는다는 것도 있지만 힐링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제는 몇 안 남았지만 이 댁 저 댁에 회례(廻禮)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한나절이 후딱 간다. 밤이 깊어질수록 고향의 정은 그윽해진다. 오순도순 모여앉아 이야기보따리가 펼쳐지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다들 퍽퍽한 삶이지만 그래도 이때만큼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귀를 쫑긋거리며 설레고, 어른들은 아련한 고향의 향수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라 더 설렌다.

달빛의 밝음을 무게삼아 모처럼 수다를 떤 전날 밤의 행복감을 뒤로하고 창문으로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껴 들어온다. 깊은 잠을 깨운 것은 뒷담의 감나무에 앉은 까치다. 시인 김남주가 ‘옛 마을을 지나며’에서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이라고 노래한 그런 감나무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목(老木)이다. 어린 시절 한없이 커 보여 감히 범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친근감이 넘친다. 하늘 끝에 걸린 빨간 홍시 서너 개를 품고 까치와 놀고 있는 감나무는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 가족을 맞아준다. 앙상스럽게 몸통만 남아 메말라 보이지만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정감이 철철 흘러넘친다. 이렇듯 힘들거나 지칠 때 고향은 삶의 안식처이자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그런 존재다. 넉넉한 이들에겐 남을 위해 배려를 하라고, 축 처진 이들에겐 용기를 내라고 속삭인다. 고향이 주는 포근함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바야흐로 불안의 시대다. 굳이 높은 청년실업률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젊은이들의 일자리 문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인건비 부담이 가중된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속출하고 있다. 실직 등으로 거리나 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가족해체로 독거노인들도 넘쳐나고 있다.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 의지하는 형영상조(形影相弔)의 처지라고나 할까. 이들에게 고향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고 있다. 외롭고 고립된 개인이 늘어나면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뿐 아니라 공동체의 분열, 불안한 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를 더 갈구하는지 모르겠다. 누구 한편의 소유가 아닌, 골고루 뿌려주는 고향의 정 같은 포근함도 그리워한다. 고향의 넉넉한 달빛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퍽퍽하고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픈 심정으로.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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