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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조민영] 사법의 힘과 엄벌주의

입력 2019-02-08 04:05:01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 구속은 설 연휴 전후로 서초동의 최대 이슈였다. 불과 1주일 전 온 언론이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라고 떠든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은 순식간에 흐린 기억 속의 일이 돼 버렸을 정도다. 이틀 뒤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항소심 재판에서 사실상 전부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양 전 대법원장 구속이 결정되기 직전인 지난달 23일엔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기소된 안태근 전 검사장이 1심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지만, 서초동 안팎에선 굉장히 이례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여졌다.

1월 23일 안 전 검사장 법정 구속부터 2월 1일 안 전 지사 법정 구속까지 단 열흘 사이 법원이 결정한 일들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나 나올 법한 ‘칼바람’ 얘기가 법원을 두고 나오기 시작했다. 법원발 ‘구속 칼바람’이 불고 있다는 말이다. 여권에서는 김 지사 1심 선고를 맡았던 성창호 부장판사의 이력을 근거 삼아 사법농단 사태 주역인 ‘양승태 사단’의 보복이라는 주장까지 내세웠다. 다만 법원 사정을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선 정치권의 ‘보복 구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사안을 너무 단편적으로 축소해 보는 것으로 평가한다. 더 큰 차원에서 지금 법원의 행태는 ‘원래 우리가 알던 법원의 모습’을 벗어나려는 변화의 조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초동에서 오래 활동한 한 변호사는 “김 지사의 판결문과 당일 재판에서 재판장이 한 말들을 보면 정치적 입장을 떠나 ‘불의를 추상같이’ 심판하고자 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된 판사들이 ‘정의로움’을 내세우고 싶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고 덧붙였다. 사법농단 사태 등으로 코너에 몰린 법관들이 ‘사법 권위’를 세우는 방식으로 형사 재판에서 엄격한 판단을 내세우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실제 최근 잇단 법정 구속으로 ‘법원의 힘’을 새삼 깨달았다는 이들이 많다.

변화의 조짐은 법관들 스스로도 말한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한 부장판사는 “(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아보면서 판사들도 느낀 바가 많았다. 검찰 수사 관행 등 여러 문제를 당사자가 돼 경험하면서 그동안 형사 재판에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한 법관도 많을 것이다. 법관들 스스로 ‘우리도 모든 것을 한번 원칙대로 해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법정 구속 사례만 해도 원칙에 빗대 보면 실형을 선고하고도 불구속하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다. 힘 있고 가진 게 많은 이들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원칙대로’ 하겠다는 법원의 변화는 일단 타당하다. 그동안 법원이 국민 감정과 동떨어져 법 논리만 따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신들의 문제가 돼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검찰 수사 관행의 문제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다잡은 것도 국민들의 이익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모두 다 옳다 해도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혹여 법관들이 사법농단 사태로 뒤집어쓴 ‘불의의 오명’을 벗기 위해 ‘불의에 대한 엄벌’의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늘 서류로만 일하던 판사가 자신이 가진 힘을 가장 직접 체감할 때가 법정 구속을 명할 때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옆동네 검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피의자들을 잡아넣으며 ‘칭찬’ 받는 듯 해 보여도 사법권을 지닌 법원은 다르다. 입법 행정과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3대 권한인 사법권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강제로 제한할 수도(구속), 재산권 행사를 막을 수도, 생명마저 빼앗을 수도 있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법의 힘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정한 것은 법관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힘을 ‘법률 안’으로 제한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법관은 가장 겸손하고 가장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점을 변화의 지점에 선 지금 결코 잊지 말길 바란다.

조민영 사회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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