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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보수에 다시 던져진 질문 ‘너는 누구냐?’

입력 2019-02-19 04:05:01


3년의 터널을 빠져나오던 보수 5·18 설화로 다시 기로에 섰다
극우 프레임에 맞닥뜨린 채 정체성 질문에 답해야 할 상황
정답은 제헌 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
이를 굳건한 신조로 삼아 확장적 통합을 추구해야


정권의 실정에 대한 반감으로 보수로 다시 눈을 돌리던 사람들이 5·18 설화 건으로 화들짝 놀랐다. ‘어, 이게 뭐지? 전두환 정권을 정당화하는 보수였어?’ 보수가 다시 기로에 섰다. 지난 3년의 터널을 이제야 빠져나오나 싶었는데 큰 화두 하나가 떨어진다. ‘너는 누구냐?’ 바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지난 2년 촛불을 앞세운 적폐청산 공세는 다른 한쪽에서 보수층의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적대를 증폭시켰다. 주말마다 집회가 열렸고, 사람들은 늘어갔다. 유튜브는 이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공간이었다. 그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의미 있는 역할도 했다. 담론과 학습의 장이 됐다. 결집했다. 힘도 생겼다. 하지만 ‘광장의 논리’는 좌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광장의 우파도 그들을 닮아갔다. 광장에서는 거침없는 하이킥으로 집단 흥분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주도한다. 유튜브에서도 이런 목소리를 운반하는 곳에 조회 수가 몰린다. 혐오는 어느덧 보수 일각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가치와 노선의 혁신을 도모하겠다던 자유한국당도 지지 기반인 이들의 목소리에 경사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이번 사건까지 불러온다. 그동안 정권이 실정으로 내놓은 맛있는 반찬들에 군침만 흘리다 하필이면 상한 반찬을 집어 먹은 꼴이다. 동물적 정치감각을 가진 여당은 놓치지 않는다. 한국당에 극우의 프레임을 씌운다. 단순한 정치공방을 떠나 이 사안은 한국의 보수에게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김진태 후보는 오세훈 후보에게 TV 토론에서 ‘태극기냐, 촛불이냐’고 물었다. 오 후보는 ‘유치한 질문’이라고 답했지만, 그 질문은 태극기와 촛불 사이에 광범한 정치적 공간이 있다는 것을 교묘히 감춘다는 점에서 고약하다. 여기서 한국당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정체성을 ‘자신에게 참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방식을 발견하는 내면의 울림과 진정성(authenticity)’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자아의 정체성은 ‘내면의 나(I)’와 ‘보이는 나(me)’가 부단히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다. 정치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가치와 태도, 그리고 바깥에서의 이미지가 상호작용하면서 구축된다. 따라서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궤적을 그리게 되어 있다. 19세기 중반에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미국의 공화당이었고, 이를 반대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오늘날 사회적 소수의 권리를 가장 강조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열렬한 옹호자가 민주당이고, 거꾸로 소수 보호의 명분에 의한 다수 이익 훼손의 열렬한 방어자가 공화당이다. 그럼에도 정체성의 골간은 유지했다. 긴 역사 속에 공화당은 자유 보수주의를 민주당은 사회적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유연하게 진화해 왔다.

한국 보수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로 만들고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데 대한 자긍심이 근간이다. 이를 계승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충실한 가치와 프레임을 살려나간다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한 얼룩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얼룩들이 마치 대한민국 전체의 얼굴인 것처럼 왜곡하는 좌파의 역사 인식에 대해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이것이 보수의 역사 가운데 걸러내야 할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자기비판과 성찰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나무랄 데 없는 가치다. 지난 70년은 이 세 가치를 구현해온 지난한 과정이었다. 웅덩이도 있었고, 협곡도 있었고, 구부러진 길도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나침반은 일관되게 이 방향을 가리켜 왔다. 이 가치들을 바로 세우고 풍부하게 하는 데서 새로운 보수의 정체성이 찾아져야 한다.

좌파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광장 민주주의, 공화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이와 달리 우파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굳건한 신조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태극기냐 아니냐는 식의 편 가르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혁신과 통합, 그 둘을 이어준다. 보수가 진정한 자유주의자, 진정한 민주주의자, 진정한 공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혁신하면서 이 정체성을 중심으로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확장적 통합을 할 것인가, 아니면 수축적 분열을 지속할 것인가는 보수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확장적 통합은 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미래에도 붙들고 갈 가치를 정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정체성이 구성되어야 가능하다. 새로운 정체성은 과거의 얼룩을 덮어버리거나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사탄’ 대하듯 하는 배제의 논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범보수를 아우르고 중도의 많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되새기고 벼리고 단장하는 일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 (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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