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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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원재훈] 맹신자들

입력 2019-02-20 04:05:01


정치인의 발언은 아무리 엉뚱한 내용이라도 분명히 어떤 의도, 즉 자신의 향후 행보와 이어지는 정치적 포석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은 복잡하고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을 통해 어떤 전략을 선택할지 가늠해 보는 것이 성숙한 인간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광주 5·18 망언으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할까. 어떤 정치적인 맥락이 있을까. 이런 저런 가정이 가능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저것은 맹신이 아닌가 싶다. 언론에서는 정치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하는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기 때문에 지금껏 많은 글을 썼지만 그 일만은 잘 쓰지를 못했다.

1980년 여름,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우리는 전북 익산의 시장통에 있는 막걸리집에서 광주에서 올라온 대학생과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의 친구였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박인환 시인의 노래처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눈동자와 입술이 기억난다. 그리고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진압군 총검에 입은 상처가 선명하다. 지금까지도 그 상처는 징그러운 뱀처럼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옥죄고 있었다. 그는 상처를 보여주고, 술을 마시면서 울기만 했고,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너희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그리고 90년대로 시간은 흐른다. 나는 광주에 있는 곽재구 시인에게 놀러 간 적이 있다. 여행자이기도 한 선배님과 같이 있으면 우리나라의 보석과도 같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고 박완서 선생도 곽재구 시인에게 여행 장소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는 어떤 장소를 알려주실까 싶어 내심 기대를 했었다. 그때 시인은 5·18 민주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희생자 묘지에서 묵념을 하고 비석과 사진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렸다. 마침 오후의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가을바람이 조용하게 불어서 감정조절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시인은 어떤 돔과 같은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과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은 외부와 차단된 동굴처럼 여겨졌다. 희생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세상과 마주하자, 나는 드디어 감정조절에 실패해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말았다. 얼마나 소리를 내면서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곽재구 시인이 내 어깨를 만지면서 진정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1980년 만났던 친구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리면서 고통스러웠다. 진실 앞에서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내면에서 들렸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5·18 망언은 인문학적으로는 이런 맥락으로 볼 수도 있겠다. 평범한 개인이 불우한 시대를 만드는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가 이제 고전이 된 저서 ‘맹신자들’의 첫 페이지에 파스칼을 인용했다. 이 글이 우리 시대가 잘못되고 위험한 도정에 있음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 진실은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책망하게 한다.

이제 봄이 오고 있다. 파주에 있는 공동주택 조경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단지 내에 있는 나무들의 가지를 무자비하게 쳐내고 있었다. 나무는 자신을 무성하게 하는 가지와 줄기를 다 버리고 기둥만 우뚝하니 버티고 있다. 사람도 때로는 저런 모습으로 성장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결함과 자기를 책망하는 시간은 한 인간을 무성한 나무처럼 자라게 하는 정지작업이다. 이것은 기독교 원리 탐구에 천착한 파스칼이 강조한 사유이다.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로 이루어지고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권한다. 그것이 도덕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원재훈(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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