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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의 두 사람, 10분마다 3번씩 거짓말한다”

입력 2019-04-20 04:05:02
사진=게티이미지
 
가수 승리. 권현구 기자







 
사진=게티이미지


“해당 기사는 조작된 문자메시지로 구성됐으며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 … 가짜뉴스를 비롯한 루머 확대 및 재생산 등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 대응할 것.”(YG엔터테인먼트)

모바일 메신저 대화 내용과 함께 성접대 의혹이 제기됐을 때 가수 승리(본명 이승현) 측이 보인 기만적 태도는 새롭지 않다. 법적 대응이라는 칼자루를 들어 보이며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젠가부터 논란에 맞서는 매뉴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야 잘못을 시인하고 고개를 숙인다. 초기의 거짓 해명이나 나중의 공개 사과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익숙해진 광경이지만 이런 사례들은 사회 전체의 피로감과 실망감을 누적시키고 이웃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는다. 진실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고 기만이 익숙해진 사회에서 실제 누명을 쓰고 괴로워하는 이들의 항변은 제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리고 아이들은 거짓말을 자기생존의 한 방편으로 내재화하게 된다.

여러 거짓말

심리학자 로버트 펠드먼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교수는 서로 알지 못하는 100여명을 대상으로 2명씩 짝지어 자기소개를 하게 한 결과 평균 10분에 세 번 정도 거짓말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저서에서 전한 바 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 동안 최대 12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의 거짓말들이 모두 나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는 거짓말에 악의를 담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자신의 배경이나 능력 따위를 부풀리거나 단점으로 여겨질 만한 사실을 감추는 식일 것이다. 예의상으로나 호감을 얻기 위해 마음에 없는 칭찬을 하거나 동의와 공감의 표현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사실을 숨기거나 사실과 다른 것을 드러내는 언행을 기만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거의 모두가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거짓말과 허용돼서는 안 되는 거짓말을 구분할 때는 의도와 결과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여러 기만 사례에서 사람들이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대목은 거짓말이 타인에게 직접 해를 끼치거나 정의의 문제와 관련한 진실을 덮으려 할 때다.

기만은 사실 또는 진실을 숨기거나 거짓 또는 본질과 동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The Varnished Truth’(꾸며진 진실)의 저자 데이비드 나이버그는 “기만은 진실을 모두 부정하기보다 진실을 편집하는 것에 가깝다”며 기만의 방식을 6가지로 정리했다. 진실한 사실을 감춰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은폐’, 본래와 다르게 바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왜곡’, 불확실한 것을 제공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혼란(주기)’, 실제 모습 대신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것을 꾸며 보여주는 ‘모방’, 아예 없거나 실제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위조·날조’, 핵심이 아닌 부분을 과장·강조해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오도’ 등이다. 이런 기만의 여러 방식은 어떤 의도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비교적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 흔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경우를 적극적 거짓말, 딱히 그럴 생각이 없는 경우를 소극적 거짓말로 구분한다. 대형 정경유착 사건이었던 ‘옷 로비 의혹’으로 시끄럽던 1999년 송재범 인천대 강사는 학회지 국민윤리연구에 게재한 논고 ‘기만과 거짓말에 대한 윤리학적 소고’를 통해 국회 청문회 증인들의 거짓말에 대해 탐구하며 거짓말을 대상과 의도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했다.

송씨는 먼저 공격적 거짓말로 자기학대적 거짓말, 오도적 거짓말, 즐기는 거짓말, 공멸적 거짓말, 적대적 거짓말, 혹세적 거짓말 등 6가지를 제시한다. 자기학대적 거짓말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더욱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경우다. 삶의 궁지에 몰려 자포자기한 이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거짓말이다. 막대한 도박빚을 진 사람이 처벌을 감수하고 사기행각을 벌이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재미나 습관으로 하는 즐기는 거짓말은 타인에게 잘못된 정보를 줘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제삼자에 대한 중상모략 등을 포함하는 적대적 거짓말은 대화 참가자와 무관한 내용이기에 더 쉽고 빠르게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본능적 거짓말, 계획된 거짓말, 악의 없는 거짓말, 정감적 거짓말, 우호적 거짓말, 공공선을 위한 거짓말 등 나머지 6가지 유형은 보호적 거짓말로 분류된다. 계획된 거짓말은 수사나 재판 과정, 국회 청문회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정감적 거짓말은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어느 정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인사치레 수준의 ‘악의 없는 거짓말’과 구별된다.

진실게임

주요 사건 관련자나 인사청문회 후보자의 거짓말은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우호적 거짓말)이면서 사전에 준비된 거짓말(계획적 거짓말)의 성격이 짙다. 이들 대부분이 논란 초기에는 “허위사실”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가 증거를 통해 의혹이나 범죄 혐의가 확인되고 나면 그제야 잘못을 시인하고 공개사과를 하는 패턴을 보인다. 대중과 진실게임이라도 벌이는 듯한 이들의 태도는 세간의 분노와 경멸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어떤 이들은 거짓말이 밝혀진 뒤에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했던 거짓말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말실수 또는 과장이었다고 주장한다.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고도 사실이 탄로난 뒤에는 기억에 착오가 있었다는 식으로 발뺌하는 이들도 있다. 기만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버티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취해 제대로 판단을 내릴 상태가 아니었다거나 조직 위계상 자신이 최종 판단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블랙리스트 사건’ 같은 조직적 비위 사건에서 담당자들이 자신은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쉽게 볼 수 있는 예다. 거짓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자신의 거짓말이 개인 이익이 아니라 소속 조직이나 사회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변론한다.

전문가들은 개인이 경쟁적일수록, 조직 내 연고주의가 강할수록 거짓에 관대해진다고 설명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황태영씨는 정책학 석사학위 논문 ‘공직자의 거짓말에 관한 연구’에서 사적 친밀감을 중시하는 조직문화가 공사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승진 등 인사상 이익을 위해 거짓말에 관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조직에 종사하며 적응하거나 순응할 경우 부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지적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은종환씨는 박사학위논문 ‘회색부패에 관한 연구’에서 거짓말에 대해 관대할수록 부패에 대해서도 관대한 성향이 있다고 서술했다. 황씨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조직에) 들어온, 수직적 개인주의 가치관이 강화된 공무원들이 개인의 발전을 위해 거짓말을 이용하기 쉽다”며 “이러한 개인들이 연고주의, 사적 친밀감을 중시하는 조직문화에서 일을 한다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공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공공과 민간의 차이를 살펴본 황씨의 연구에서 두 영역 간 거짓말 경향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쪽이라고 거짓말을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직이나 집단을 위한 일이라면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공공과 민간을 떠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 중 하나다. 어떤 비위 사실이 드러나 조직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태 악화를 막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2009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간부의 성폭행 미수 사건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지도부는 피해자였던 소속 여교사에게 ‘외부에 과장된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나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조직의 안위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경우에도 내심으로는 조직·집단 내에서 자신이 이익을 얻거나 현재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거짓말이 만드는 미래

잇따르는 거짓말 사례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된다. 상대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면 서로가 더욱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 몇몇 거짓이 다수의 진실을 뒤덮어버리는 문제도 있다. 누명을 쓴 이들의 항변마저 일단 거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제는 어떤 말도 믿지 않는 상황이 돼버려서 진실을 말하는 이들까지도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오히려 양심적인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더 큰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거짓말을 기성세대의 보편적 행태로 인식해버리는 경우”라며 “거짓말을 우리 사회의 일반적 규범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라 20년, 30년 뒤에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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