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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의 지금, 미술] 낱낱이 뜯겨진 채 공중부양… 이것은 신발인가 미술인가

입력 2019-05-01 04:10:01
‘스니커즈 해체 미술 작가’로 불리는 루디가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서울옥션블루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벽면에 설치된 것 역시 스니커즈를 해체해서 만든 평면 작품이다. 윤성호 기자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서올옥션 자회사인 서울옥션블루. ‘사이드라인’전에 나온 루디(37·본명 임종식)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알아왔던 보통의 미술과 달랐다. 조각 작품처럼 좌대 위에 올려져 있긴 하지만, 그냥 봐도 스니커즈다. 다만, 그 스니커즈를 해체한 뒤 조형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차이 났다.

이를테면 신발 밑창으로부터 몸통이 분리됐고, 그 몸통으로부터 나이키의 로고 부분, 끈을 끼우는 구멍이 있는 부분, 뒤축에 덧댄 장식 등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와 공중부양하듯 떠 있다. 신발끈도 철사를 끼워 넣은 듯 구불거리며 뻗어 나와 조형미를 뽐낸다.

이것은 신발인가, 미술인가. 루디의 작품이 갖는 미술성에 대해서는 평론가들의 논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도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그 전시에, 즉 미술작가로 소환되는 방식이다. 그를 작가로 명명한 건 전문가인 미술비평가가 아니라 대중이다. 정확히는 컬렉터 시장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20∼30대 밀레니얼 세대와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상업 자본이다.

루디는 부산예술대 출신의 래퍼 지망생이었다. 그는 이날 전시장에 자신의 작품을 프린트한 맨투맨 티셔츠에 야구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작가보단 래퍼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루디라는 이름 역시 힙합을 할 때 쓰던 별명이다. 팀이 깨지며 언더그라운드 활동의 꿈이 좌절된 그는 동생이 먼저 정착한 미국 뉴욕으로 무작정 갔다. 그래픽 디자인을 속성으로 공부한 뒤 현지 웨딩숍 등에서 사진작가, 비디오그래퍼로 일했다. 2014년 귀국해서는 게임방송 PD를 하다가 2016년 동생과 사진영상 프로덕션을 차렸다.

스니커즈에 눈을 뜬 건 우연한 계기였다. 피규어 아티스트 쿨레인(본명 이찬우)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5.5㎝에 불과한 작은 피규어가 신은 신발이 하도 정교해 감탄했더니 쿨레인이 말했다. “이 신발, 진짜와 다름없이 만들었어. 신발 한 족당 10~20조각이 들어갔거든. 밑창, 인솔, 에어, 끈, 힐컵….”

그 용어들을 듣는데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 굴을 들여다보듯, 신발 속이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멀쩡한 스니커즈를 뜯기 시작했다. 분해해 놓고 보니 멋있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루디의 스니커즈 해체 미술 작업은 그렇게 지난해 1월부터 시작됐다.

스니커즈는 그저 신발이 아니다. 한정판 스니커즈는 시판가 10만~20만원대라도 전용 거래 사이트에서 100만~300만원대에 팔리기도 한다. 패션 디자이너 션 워더스푼이 디자인한 나이키 에어 맥스는 16만9000원짜리가 100만원대 초반에, 패션 브랜드 오프화이트와 협업한 나이키 에어 조던 1 시카고는 22만9000원짜리가 475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일종의 투자 상품이다. 한정판 제품이 나오면 강남과 홍대 근처 매장에는 마니아층들이 밤샘 텐트까지 쳐가며 줄을 선다. ‘스니커즈 계’를 하는 고교생들도 있다.

루디가 자신의 스니커즈 작품을 재미 삼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로 스니커즈 문화를 공유한 밀레니얼 세대들이었다. 인스타를 타고 그의 작품 사진은 퍼져나갔다. 마침내 지난해 서울 난지도에서 열린 한 힙합 페스티벌에서 그에게 작품 전시를 의뢰했다.

전시한 작품은 해외 유명 스니커즈 커뮤니티에 올려졌다. 누군가 그를 ‘코리안 스니커즈 아티스트 루디’라고 소개했다. 디자이너 션 워더스푼도 그걸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루디가 세계에 알려지는 기폭제가 됐다.

이후 전시는 날개를 단 듯 이어졌다. 올해 들어서는 밀라노 패션 페스티벌, 파리의 스니커즈 스토어에서 전시를 했다. 일본 스니커즈 문화를 이끄는 브랜드 아트모스와 협업해 도쿄 지점과 방콕 지점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저도 이렇게 작품으로 인정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처음엔 그저 신발의 내부 세계를 잘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점점 미적인 부분에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예컨대 보드용 스니커즈의 경우 보드 동작을 작품 속에 구현해보고자 하는 거지요. 작품을 만들지 않았지만 작품성이 부여됐기 때문에 작품이 된 거 아닐까요?”

그렇게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작가가 된 그는 지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처음엔 작가님 소리도 쑥스러웠어요. 계속 활동하다 보니 받아들여지게 되더라고요.”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울옥션블루는 루디의 작품을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에 있는 외곽의 미술이라고 표현했다. 서울옥션 블루는 밀레니얼 세대가 ‘환장하는’ 수집품인 스니커즈를 지난해 말부터 온라인 경매회사 최초로 경매 아이템으로 출품하면서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물론 그의 전시는 정통 전시공간인 미술관이나 순수 갤러리에서 열리지는 못했다. 힙합 페스티벌, 편집숍 론칭 행사 등 상업적 이벤트의 현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작가로 필요로 하는 세계에서 그는 작가로 건재하다. 스니커즈 문화를 즐기는 밀레니얼 세대와 상업 자본이 구축한 또 다른 생태계 안에서 그는 작가다. 이건 새로운 현상이다. 전시는 6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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