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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뮤즈 이전에 음악가로 조명돼야할 클라라 슈만

입력 2019-05-12 21:10:03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음악가 클라라 슈만(1819~1896)은 슈만과 브람스의 뮤즈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위키피디아
 
클라라의 모습이 인쇄된 과거 독일 화폐. 위키피디아


"이토록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가 터졌을 때/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열렸네."

5월은 슈만의 곡 '시인의 사랑'이 애청되는 달이다. 첫 곡 '아름다운 5월에' 때문이다. 꽃 피고 새가 노래하는 5월에 사랑이 열리고 연인에게 그리움을 고백했다는 가사는 하이네의 시지만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슈만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1840년, 장인의 반대로 법적 소송까지 하면서 2년 가까이 끌어온 클라라 비크와의 결혼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곡은 슈만이 아내 클라라에게 헌정한 결혼 기념 노래다.

우리에게 '클라라 슈만'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그녀는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연하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뮤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편에게 영감을 주며 내조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클라라 슈만에게 덧씌워진 인상은 오랜 세월 남성 중심적인 예술계가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슈만의 피아노 스승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외동딸이었던 클라라는 10살이 되기 전에 유럽 투어를 다닐 만큼 어린 시절부터 신동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여성 음악가를 도통 인정하지 않던 19세기 보수적인 유럽 음악계가 예외로 인정할 정도로 클라라의 능력은 월등했다.

파가니니는 그녀에게 협연을 청했고, 쇼팽은 리스트에게 그녀의 재능과 음악성을 극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비크가 제자 슈만과 딸의 결혼을 결사반대한 이유도 슈만이 무능하고 문란한 음악가라는 것보다 결혼이 딸의 음악가로서의 커리어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결혼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클라라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 피아노 연주는 다시 뒷전으로 밀려났고, 로베르트의 작곡만이 언제나 중요할 뿐이다."

슈만은 처음에는 아내의 재능을 높이 사 연주 여행에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아내에 대한 음악가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곧 동행을 그만뒀다. 클라라는 작곡에도 능숙해서 여러 실내악 곡을 남겼지만 결혼 이후 남편의 눈치를 보며 이를 그만뒀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도 단절됐다.

클라라의 재기는 남편 슈만이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가장의 능력을 상실한 후 가능해졌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연주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남성 음악가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그녀는 연주회 때마다 슈만의 작품을 연주했고, 그의 작품을 유럽 제1의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가 연주한 덕분에 자칫 무명 음악가로 남을 뻔한 남편 슈만은 역사에 남는 명작곡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홍보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음악가 클라라의 존재감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올해는 그녀의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다. 슈만의 뮤즈로만 알려진 클라라 슈만이 아니라 시대를 빛낸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클라라 비크를 조명할 때가 됐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 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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