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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전석순] 잡초의 이름

입력 2019-07-05 04:05:01


풀 이름을 묻는 조카에게 잡초라고 알려줬다. 괜히 으쓱거리며 얼마간 환한 표정을 짐작했지만 오히려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집 앞에 있는 것도, 공원에 있는 것도 다 잡초야? 잡초는 서운하겠다.” 순간 할머니가 입원했을 때가 떠올랐다. 부리나케 달려간 것과는 달리 병실을 찾지 못해 한동안 로비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할머니 이름을 모르는 탓이었다. 그동안 그저 할머니일 뿐 이름으로 떠올려보지 않았다. 할머니가 알았다면 잡초처럼 서운하지 않았을까.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대상을 가볍게 보거나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이어지곤 한다. 누군가를 “야”나 “어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보면 대부분 ‘그거’가 아닌 이름이 있다. 귤에 붙어 있는 것은 하얀 무언가가 아니라 귤락이라고 한다. 피자 박스를 열면 한가운데 보이는 플라스틱은 피자 세이버, 빵 봉지를 묶을 때 쓰이는 끈은 브레드 클립, 점포 앞에서 춤추는 풍선은 스카이 댄서라고 부른다.

이름 안에는 고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름과 함께 의미까지 생략하거나 지나칠 때가 많다. 의미를 알면 대상에 더 깊이 스며들 수 있다. 학교에서 이름을 한문으로 백 번씩 써오는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다 쓰고 나서야 숙제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름의 뜻뿐만 아니라 이름을 지은 사람이 품었던 마음까지 짐작해보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의미를 모르는 것을 넘어 잘못 이해한다면 쉽게 선입견에 빠지기도 한다.

먹골역 근처에 작업실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먹자골목인 줄 안다. 하지만 ‘먹골’은 조선시대에 먹을 만들던 곳이라서 나온 이름이다. 근처 봉화산에서 자란 소나무로 참숯을 만들어 먹을 만들었는데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동네 이름이 묵동(墨洞)인 이유도 여기에 숨어 있다. 묵을 잘하는 집이 많은 먹자골목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호칭은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을 두고 ‘사건’이라고 하는 쪽과 ‘사고’라고 하는 쪽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호칭 하나 때문에 의도치 않은 모습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사님’이라고 부를 때와 ‘기사양반’이라고 부를 때 달라지는 온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대상을 가리킬 때만 나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가리킬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명칭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름이니 그대로 유지해 혼란과 낭비를 막자는 쪽과 지금부터라도 사회문화적인 뜻에 따라 정확한 이름을 붙이자는 쪽의 의견이 팽팽하다.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는 근본적 해결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입장과 이름부터 바뀌어야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바뀐 호칭만으로도 기존의 태도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애완견을 반려견으로, 벙어리장갑을 손모아장갑이라고 바꿔 부르자는 목소리도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애완견의 ‘완(玩)’이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동물은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벙어리는 언어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때밀이를 세신사나 목욕관리사로 바꿔 부르는 것도 호칭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자는 목적이 있다. 정상인을 비장애인으로, 몰카를 불법촬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적 병역거부자로 바꿔 부르자는 방향 역시 호칭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정기’예방접종을 ‘필수’예방접종으로 바꿨다. 예방접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다. 정신지체라는 단어는 2007년 장애인복지법 관련 규정에 따라 ‘지적장애’로 바뀌었다. 정신지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부족하다거나 지연시킨다는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남편을 따라 아직 죽지 않은 뜻의 미망인이나 다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의 불구자가 거의 쓰이지 않는 이유도 변화에 대한 바람 때문일 것이다.

조카는 잡초에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자못 진지한 얼굴로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본다. 딱 들어맞는 것 같으면서도 더 좋은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다른 단어를 끼워본다. 이름을 짓는 과정에는 애정과 관심 그리고 잡초를 향한 마음까지 빼곡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부를 때 한 번쯤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전석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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