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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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이승우] 로저 페더러의 말

입력 2019-07-17 04:05:02


올해 윔블던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 경기는 5시간 만에 우승자가 결정됐다. 이번 대회부터 선수 보호를 위해 5세트의 게임 스코어가 12대 12일 때는 타이브레이크로 승부를 결정한다고 규정을 바꾸는 바람에 5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만일 듀스 상태에서 한 선수가 두 게임 이상 차이로 이겨야 하는 기존의 규정을 적용했다면 얼마나 오래 경기를 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만큼 박빙이고 아슬아슬한 경기였다. 개인적으로 오래전, 그러니까 샘프라스와 아가시의 US오픈 결승전을 감탄하며 보았던 2000년대 초반 이후 가장 집중해서 본 테니스 경기였던 것 같다. 나처럼 중계를 보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테니스 팬이 아마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긴 시간 접전 끝에 노박 조코비치가 로저 페더러를 이기고 133회 윔블던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5시간 동안 윔블던의 잔디코트를 뛰어다닌 이 두 선수는 같은 30대였고, 페더러는 37세였다. 페더러는 2001년 첫 ATP 대회 우승자가 된 이후 올해 100승을 거두었다. 윔블던에서도 이미 8번이나 우승했다. 올해 그가 조코비치를 꺾었다면 그는 메이저대회 최고령 우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의 정확하고 우아한 폼을 교본처럼 여긴다. 사실 그가 이룬 업적보다 그의 성실함과 꾸준함이 더 존경스럽다. 우리 나이로 내년이면 마흔 살인 그가 어떤 운동보다 격렬한 테니스 단식경기를 5시간씩 뛸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성실과 꾸준함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프로의 시스템은 너무나 정교하고 엄격해서 외부적 강요나 인위적 조정 없이 자율적으로 선수들을 무대에 끌어올리고 끌어내린다. 어떤 분야든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도 대단하지만, 그런 가차 없는 시스템 아래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한 보도에 의하면 경기가 끝난 후 페더러는 자기 모습이 여러 사람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스스로 이 나이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른 37세들도 나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귀족풍의 외모를 가진 이 스위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37세들이 페더러가 이루어낸 기록적인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말했겠지만, 나는 그 말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듣는다. “당신도 나처럼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도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뛰고 있는 나처럼 치열해질 수 있고 나처럼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할 수 있다. 나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다.”

물론 결과가 언제나 확실하게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결과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나이와 상황, 형편 등을 내세워 꾸준히 노력하지 않고 치열하기를 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봤자 어차피 안 될 걸 뭐. 공연히 헛수고하는 거야.”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예단과 근거 없는 추측이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상황에 순응하게 한다. 주저앉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우리가 확보해 가지고 있는 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대표적인 것이 생물학적 나이이다. 생물학만큼 무너뜨리기 힘든 엄정한 시스템도 달리 없긴 하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존재다. 이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도, 이 시스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나이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내기 힘든 요건일 수 있다. 그러나 혹시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낼지도 모르는(누가 아는가!) 치열함을 포기할 요건은 아니다. 결과는 나중에 나타나면 보게 되는 것이지, 지금 예단하고 추측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어떤 그럴듯한 이유로, 가령 심은 지 오래되었다거나 작년에도 거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과를 미리 예단해서 돌보지 않는 것은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모든 37세들이 페더러가 이루어낸 일을 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나 그가 한 것처럼 치열하게 살 수는 있다. 그처럼 성실하고 꾸준할 수는 있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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