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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수 칼럼] 트럼프를 움직여라

입력 2019-07-24 04:05:01


문 대통령과 아베, 타협 어려운 상황… 미국 중재 필요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미온적 입장
GSOMIA 지렛대로 사용하되 거래 달인 트럼프 상대하려면 실제 파기도 옵션에 포함해야


싸움을 앞두고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다. 당사자간 협상이나 누군가의 중재로 싸움을 피하는 것이 가장 좋고, 이게 안 되면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과 일본은 당사자끼리 타협하기 어려운 매우 고약한 상황에 놓여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성향부터가 그렇다. 문 대통령의 경우 남을 먼저 공격하거나 시비를 거는 성격은 아니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더구나 문 대통령은 지금 한·일 갈등의 단초가 된 강제징용 배상 소송에 참여했던 당사자다. 2000년 법무법인 부산의 인권 변호사로서 소장과 증거자료 제출 등 재판 업무를 도맡았다. 이 소송은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이겼다. 이 판결을 부정한다는 것은 문 대통령의 가치관이나 신념 체계상 불가능하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법원 판결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른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런데 아베는 누구인가. 일본을 2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한국 때리기를 통해 일본내 보수층을 결집해 개헌을 추진하려 한다.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도 그 일환이다. 그의 폭주는 정치적 목적을 넘어 천황을 신으로 한 대동아공영권과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종교적 색채까지 띠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문 대통령이 아베의 이런 부당한 처사에 굴복할 것 같은가. 더구나 일본의 부당한 경제 보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여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싸워 끝장을 보지 않을 거라면 결국 남는 것은 중재밖에 없다. 중재할 수 있는 적임자는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미온적이다. 그 전에도 그랬다.

1945년 미국은 군정 법령을 통해 한반도내 일본인들의 사유재산을 압류했다. 적산으로 불리는 이 재산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우리 정부에 이양됐다. 나중에 일본은 이 재산에 대한 배상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적산을 압류한 것은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유권해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의 답변은 한·일 양국이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미국의 중재에 대해 일부에서는 우리 스스로 외교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에 의존하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한·미 동맹도 그만둬야 한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왜 외세에 의존하는가. 미국에 중재를 요구하되 당당히 해야 한다. 미국이 나몰라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봐도 온당치 않다. 한·일 간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추진됐다. 냉전체제로 인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어 공산주의에 대항하기를 원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는 당시 박정희정권을 위협했지만 주한미군 사령관의 허가에 따라 군대를 동원한 위수령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미국이 지금의 한·일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다.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 둘다 원한다면 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말은 아베가 중재 요청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핀잔을 감수하면서도 북·미 정상회담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1,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판문점 회동 때도 판을 깔아주고 조연으로 물러서는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을 세워줬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신세를 갚을 차례다. 그런데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렛대가 필요하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냉정한 자세 운운하며 가만히 있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이 협정은 순전히 미국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일본과 군사 협력을 하는데 대한 반대 여론이 많아 밀실에서 추진됐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재검토 입장을 밝히자 화들짝 놀란 미국이 급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보냈다. 볼턴 보좌관은 일본을 거쳐 서울에서 정 실장 등과 지소미아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이 중재하는 시늉만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으로 노력하는지 여부는 우리가 귀신같이 알아낼 것이다. 우리도 거래 기술자인 트럼프를 움직이려면 지소미아 폐기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나중에 다시 맺는 한이 있더라도 실제로 파기하는 방안까지 옵션에 넣는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다고 안보가 파탄나는 것도 아니다. 지소미아로 우리가 얼마나 군사적 이득을 보고 있는지 몰라도 민족 감정과 이데올로기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한·일 간의 싸움을 막는 게 급선무다. 미국이 중시하는 한·미·일 3각 동맹도 그래야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신종수 논설위원 js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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