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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한승주] 김복동은 외롭지 않다

입력 2019-07-30 04:05:01


지난 24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굵어지는 빗줄기도 ‘수요집회’를 막을 수 없었다. ‘평화로’라 이름 붙여진 길 위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이 차곡차곡 앉았다. 방학을 맞아 단체로 온 청소년들도 꽤 많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수요집회가 벌써 27년이 됐다. 일본 아베 정부의 참의원 선거 승리 이후 군국주의 부활이 우려되는 요즘, 이날 1397회 수요집회에는 올해 최대 인파가 몰렸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27년간 이 자리에서 투쟁을 이어가면서 할머니들의 빈자리가 커지고 있지만, 그 빈자리를 이 땅의 미래 세대들이 채우고 있어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한 무리의 남학생들은 “돈보다 사과를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자유발언대에 올라선 한 여학생은 “반성 없는 아베 정부, 용서는 없다”라고 외쳤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다리며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외롭게 놓아두지 않겠다는 마음은 다들 같았다.

집회에선 자연스레 그 이름, ‘김복동’이 언급됐다. 그는 수요집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올해 초 94세로 하늘의 별이 된 김복동. 열네 살에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 그는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하고 인권운동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마침 8월 8일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이 관객을 찾는다. 우리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특히 젊은 세대들이 꼭 봤으면 하는 이야기다.

군복 만드는 공장인 줄 알고 간 곳이 중국 광둥의 전쟁터. 해가 뜨면 외출 나온 일본 군인들을 몸으로 받았다. 반항하면 밥도 안 먹이고 때리고 가둬놓았다. 그렇게 전쟁터를 전전하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어렵게 꺼낸 얘기에 가족까지 등을 돌렸다. 속으로 끙끙 참으며 없었던 일처럼 살아오길 수십 년. 그러다 1992년 처음으로 증언대에 올랐다. ‘아시아연대회의’에서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세계 각지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일본군 성노예 제도가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후 전 세계를 돌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알렸다.

그를 좌절시켰던 사건은 2015년 박근혜정부와 일본 아베 정부의 위안부 합의였다. 일본으로부터 10억엔(약 109억원)을 받고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한다,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발표였다. 피해자들에겐 아무 상의 없이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할머니들은 분노했다. 이들이 바란 건 일본 정부의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였지 돈이 아니었다. “바로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며 맞섰던 이들이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며 사과하면 용서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지금까지도 직접적인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할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김복동은 끝끝내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월 일본 외무성은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고 2015년 한일합의를 통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으로 해결됐다.” 과연 그러한가. 강제징용 문제는 또 어떠한가. 이로 인해 촉발된 일본의 경제 보복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며칠 후면 8·15 광복절이다. 수요집회는 8월 14일로 1400회를 맞는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이지만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전쟁 가능한 나라를 향한 일본의 야심이 어느 때보다 날 선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일본대사관 앞 우리의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1명뿐. 고령의 할머니들은 사라지고 있지만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미래 세대가 있어 평화의 소녀상은 외롭지 않다. 그리고 김복동도 외롭지 않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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