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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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마음의 장면

입력 2019-08-02 04:10:01


몇 해 전 짧은 여행을 갔다. 일정 중 반나절이 비던 차에 요가 무료체험 수업 안내문을 보고 호기심에 혼자 숙소 밖 요가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두막의 문을 열자, 제각각의 언어로 소곤거리는 투숙객들이 보였다. 그들이나 나나 낯선 수업에 우연히 떨어진 초보 중의 초보들이었다. 그러나 전면의 창으로 숲이 보이는 요가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어설픈 동작일지언정 강사의 한 호흡, 한 호흡을 따라가며 자연의 거대함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학교와 병원 외에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위한 곳에서 일을 한다.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치료자들은 실제든, 상상이든 마음이 편안해지는 안전한 풍경을 떠올려 보라고 하곤 한다. 그게 별건가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충격을 받은 이들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단 한 장면조차 찾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몇 번의 시도와 전문가의 도움 끝에 간신히 안전지대(safe place)를 그려낸다. 한적하고도 평온한 자연 속 어딘가, 안락한 실내, 휴가지의 한순간, 영화나 소설의 장면이나 컴퓨터 바탕화면…. 처음에는 단 한 장면도 못 찾던 사람들이 치료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듯 점차 그 장면 속에 잠겨든다. 흥미롭게도 이런 생생한 상상은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던 신경을 순식간에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일상에 시달리며 뿔난 복어 같은 상태가 될 때면 나는 마음속 그곳에 간다. 전창으로 무성한 숲이 보이고, 발아래 오래된 나무 바닥의 삐걱이는 소리와 감촉이 느껴진다. 눈을 들면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의 움직임만 있을 뿐, 태초부터의 침묵과 거대한 자연이 나를 감싼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분노하지 말라는 것도 도망가라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일도 정당한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많다. 다만 분노와 불안, 온갖 부정적 감정이 스스로를 삼키는 것 같다면 한번 떠올려 보자. 마음을 다해 나만의 안전 장소를 찾아 몇 분이라도 그 안전과 평안에 잠겨보자. 별 도움이 안 된다면 또 다른 장면을 찾아서, 나의 뇌가 전해줄 평화를 찾을 때까지.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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