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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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전석순] 별거 아닌 질문

입력 2019-08-02 04:05:01


K는 잠이 오면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매번 눕는 순간 후다닥 달아나곤 했다. 어느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닿았다. 전문기관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디를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진료기록이 남는 것이나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곤란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뚜렷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K의 망설임은 며칠 후 나에게도 이어졌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보건소 담당자가 불러 세웠다. “시간 괜찮으면 마음건강상담실 이용해 보시겠어요?” 담당자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누군가가 일러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방이었다. 옆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가 비어 있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아뇨. 그냥 건강검진 같은 거죠.” 괜히 두리번거리면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마음도 몸처럼 검사해보기 전까진 스스로 아는 데 한계가 있죠.”

이제껏 마음을 정기적으로 검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마음도 상처가 생겼을 때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더러 큰 병으로 번지기도 할 거란 생각이 이어졌다. 대기자도 없으니 이용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상담을 받으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다. 빈 의자를 보며 의아했지만 이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마음건강상담실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고 싶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방과 달리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근처 어딘가에 숨은 듯이 앉아있으면 눈짓을 하거나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알려주는 식이었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2018년 발표한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한 해에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살시도자는 자살사망자의 10배에서 40배에 이른다. 노인자살률은 전체의 배를 넘어섰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3배 수준이다. 청소년과 청년층의 주요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것은 우리 사회의 어둡지만 분명한 민낯이다. 자살 동기로는 정신적인 어려움이 경제와 육체적인 어려움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시도자 대부분이 충동적인 선택이었고 절반쯤은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그 요청에 응답하는 활동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개인정보 노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익명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심리검사와 상담을 무료로 진행하는 기관도 많다. 상담실까지 오가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거나 스마트폰 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근 한 지방자치단체는 정신과 진료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시행한다고도 밝혔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강검진에서 우울증 검진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전국에 200개 넘게 설치돼 있다. 2016년에만 약 40만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 4명 중 1명이 정신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것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수치다. 해결을 위해 정신건강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22.2%로 낮은 편이라고 한다. 응답이 더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전문기관을 알리고 문턱을 꾸준히 낮추는 방향과 함께 진료에 대한 인식개선도 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삶에서 몇 가지 중요한 장면을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몸처럼 마음도 세밀하게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은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기관을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근처에 많은 기관과 전문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이 던지는 질문은 별거 아닌 질문이었다.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는지 배변 활동은 원활하고 잠은 잘 자는지와 같은. 하지만 일상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관심을 두는 일은 중요했다. 누군가 가까운 곳에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보다 훨씬 든든한 일이었다.

보건소를 나서면서 오랜만에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불면증으로 망설이는 K에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K가 불면을 고백하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짐작해봤다. K와 연결되자 먼저 별거 아닌 질문부터 던졌다.

전석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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