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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신범철] 가치 외교가 중요해졌다

입력 2019-08-12 04:05:01


국가 이기주의의 시대다. 전통적으로 자국 중심의 공세적 외교를 추구해 온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부르짖던 미국조차 트럼프 행정부 들어 자국 이익을 앞세우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미국에 편승하고 있고, 북한은 이참에 핵 보유를 굳히려는 모습이다. 오직 한 나라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대한민국이다.

문재인정부 외교는 언뜻 보면 ‘평화’라는 가치 지향적이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매개로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중·러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미·일을 설득해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한다.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며 한반도에 새 경제지도를 만들고 평화경제를 실현한다. 그 방향성만큼은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그 이면에 있는 심각한 문제가 보인다. 평화가 가치인양 강조되고 있지만 무엇을 위한 평화, 어떤 평화를 구축할 것인가가 생략되어 있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이 존중되는 한반도인지는 불분명하다. 냉전구조만 강조되고 그 내면에 있는 북한체제의 본질적 모습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북한 주민의 인권은 논의에서 사라지고 있고,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타협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에 있어 근본적인 도전 요인은 냉전구조가 아니다. 북한의 역사 퇴행적 독재체제와 체제 보위를 위한 핵 개발이다. 미국의 위협을 강조하는 건 북한의 논리일 뿐이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엄청난 인명 및 재산상 피해가 분명한데 무엇을 위해 북한을 침공한단 말인가. 세계질서나 경제적 차원에서 북한은 그만한 가치가 없다. 냉전구조가 부각되며 한·미동맹이나 연합 군사훈련이 문제인양 인식되고 북핵 폐기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이 의도한 바일 것이다.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역시 공동의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다자안보는 여러 나라가 모인다고 저절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목표 외에도 함께 추구하는 가치가 포함돼 있을 때 힘을 발휘하게 된다. 대표적인 다자안보협력 사례인 헬싱키 프로세스도 인권 문제가 그 성공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에는 인권이 포함되어 있는지 의심스럽다. 북한 인권 문제만 나오면 작아지는 정부의 행보 때문이다.

한반도 신경제지도와 시장경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아주 제한적으로 시장을 허용하고 있다. 그것도 워낙 경제 상황이 나빠 고육지책으로 내버려둔 것이다. 앞으로도 김정은 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한 통제경제를 지속할 수 있고 해외 투자가 필요한 분야는 한국과 중국 등을 경쟁시키며 정권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들 것이다. 북한을 어떻게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시장경제를 도입하게 할 것인지 신경제지도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국익은 북한 비핵화를 이루어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한반도를 만드는 데 있다. 우리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국익을 추구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내 국가들이 모두 자국 이기주의를 추구한다 해도 우리는 가치를 외쳐야 한다. 북핵 문제든, 영공 침범이든,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이나 호르무즈 파병 문제든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단지 갈등 없는 상황이나 대화만 진행되면 좋다는 식으로 외교가 표류하면 우리는 주변의 먹잇감이 된다. 북한의 더 큰 위협에 노출되고, 중·러의 부당한 압박에 침묵하게 되며, 미·일과의 공조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가치를 말할 때 우리는 북한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고, 중·러에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를 중시해 온 미국과의 공조에도 더욱 성공적일 수 있다. 자국 이기주의 시대에 가치 외교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강력한 무기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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