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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이도경] 남의 자녀 앞길 좌우하는 분들의 자식농사

입력 2019-08-12 04:10:02


몇 년 전 영국에서 영국 명문대를 준비하던 한국 십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학교 밖 청소년 실태를 조명하는 시리즈물을 위해 대안학교 시스템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이 유복한 십대들과 하루 반나절을 지낼 수 있었다. 취재 목적과 거리가 있어 기사로 소개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오토바이 배달 아르바이트 하는 아이들을 잔뜩 인터뷰하고 출장길에 오른 터라 깊이 각인된 기억이다.

은행 중역의 아들, 병원장 손녀, 유명 사립대 교수 자녀 네 명이 살던 숙소였다. 런던 중심부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중산층 거주 지역의 아늑한 이층집이었다. 학생들은 짙은 녹색 정원이 보이는 널찍한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교민 부부가 같이 살며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안주인의 한식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학원 등 외부 활동은 유학 업체 몫이다. 해질녘 귀가하는 스케줄에 숙소에선 한국인 유학생 과외 교습도 이뤄진다. 숙소부터 교습까지 하나의 패키지 상품으로 정확한 비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즉시 뇌리에서 삭제했던 ‘불쾌한 감정’만 남아 있다.

김승환 전북교육감 아들이 영국 입시기관을 거쳐 명문인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교육부 앞으로 몰려든 상산고 학부모들로부터 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교육감 입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김 교육감은 유학비용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때문에 ‘고액’ ‘귀족형’ 교육으로 규정한 상산고 학부모들 말에 좀 더 수긍이 갔다. 영국에서 그림 같은 잔디 정원에서 과외 교습 받던 아이들 모습과 김 교육감 아들이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올해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파동의 또 다른 축인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아들 둘을 외국어고에 보냈다. “당신 아들들이 졸업했으니 이제 필요 없어졌다는 건가.” 그가 외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주장할 때마다 주홍글씨처럼 따라붙는 핀잔이다. 국회에서 있었던 장면 하나. 야당 의원이 “본인 아들을 외고에 보내놓고 외고를 귀족학교라고 하면 조 교육감은 귀족인가”라고 추궁하자, 조 교육감은 “공적으로 외고를 다루는 것하고는…”이라며 반박하지 못하고 겸연쩍은 웃음만 지었다.

교육부 관료 중에는 자녀가 전국단위 유명 자사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부모가 있었다. 올해 재지정 평가를 받은 학교 중 하나다. 수년 전 일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이를 그 학교에 보내려 노력한 일들을 후회한다고 한다. 그의 평소 소신은 자사고에 비판적이었다. 어쨌든 그는 자사고 외고를 포함하는 초·중등 파트 업무를 직접 담당한 공직자였다. 교육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의 선택. 교육부가 입에 달고 사는 ‘일반고 전성시대’ ‘고졸 성공시대’를 어떻게 기사로 다뤄야 할까. 직업계고에 자녀를 보낸 교육부·교육청 직원 비율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은 단박에 거절 당했다.

김승환 교육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아들 논란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관계에 있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그것 중 하나가 자식들은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공감한다. 자녀 문제는 거의 모든 형태의 인간관계에서 민감 사안이다. 하지만 학부모 입장에서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선’을 넘나든다. 그리고 김 교육감은 그 꼭짓점에 위치한 사람이다.

은행 중역, 병원장, 대학 교수 같은 능력자들이 ‘헬 조선’에서 자녀를 빼 영국으로 보내든 미국에서 가르치든 관심 없다. 뭐 어쩌겠는가. 그러나 남의 자녀 앞길을 좌우하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좀 다르지 않겠는가. 자신이 다른 이에게 강제하는 교육 정책과 자신의 자식 농사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다면 납득 가능하도록 설명하는 게 옳지 않은가. 교육 행정가들은 학부모들을 구름 위에서 굽어보는 존재가 아니다. 더구나 “한 아이 한 아이 내 아이처럼 여기겠다”고 학부모들에게 약속하고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해명이 궁색하다면 사과하고 왜 이 정책이 지금 우리 교육 현장에 필요한지 설득하며 양해를 구하는 게 도리다.

얼굴 붉히며 ‘공적인 교육 정책과 사적인 자식 교육은 다르다’ ‘내 아이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해외 명문대는 국내 교육과 비교 대상이 아니다’ 따위로 해명하는 것은 ‘내 자식은 특별해서 당신 자식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더 많은 자사고·외고 평가가 예정돼 있다. 이 낯 뜨겁고 소모적인 논쟁을 해를 넘겨가며 계속할 텐가.

이도경 사회부 차장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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