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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작명소 편의점… 당신의 이름은?

입력 2019-09-21 04:05:02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씩 부업(?)이 있다. 맞이하는 손님만 하루 수백명. 때로 1000명에 이르는 손님이 찾기도 한다. 다짜고짜 “이름이 뭐예요” 물을 수 없고, 안다고 하여도 고스란히 기억할 리 만무하다. 하여 우리에게 절실한 능력은 작명가 기질. 오늘도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중이다. 물론 당신은 까마득히 모르겠지만.

가장 흔한 방식은 외모를 특징으로 삼은 별명. 키다리, 최홍만, 1초 전지현, 노랑머리, 금테안경, 초록 눈동자…. 이름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그려진다. 물론 소수자를 비하하거나 부정적 의미의 별명은 삼간다. 손님이 주로 사 가는 물건을 별명으로 붙이기도 한다. 양파링, 아이스볼트, 데자와, 의성마늘, 치킨도시락…. 근무자 교대하면서 “오늘 데자와는 다녀가셨나” 물어보면 서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제품만 매일 꾸준히 사 가는 손님이 꼭 있다. 3년간 줄기차게 데자와만 마시는 손님이시여, 그대에게 공로패를 드리리.

손님의 작은 습관이 별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오후 6시 무렵 찾아오는 남자 손님은 ‘6시 내 고향’으로 이름 붙였고(나랑 사투리가 같다), 신제품을 사고 이런저런 품평을 늘어놓는 ‘투덜이 스머프’가 있으며, 아침마다 1000원짜리 아메리카노 뽑아 드시는 ‘모닝커피’ 아저씨, 냉장고 앞에서 한참 망설이며 위아래로 제품만 살피는 ‘위아래’ 아가씨, 떠먹는 요거트를 사며 기이하게도 큰 숟가락을 찾는 ‘숟가락’ 할머니, 이미 계산 끝났는데 항상 그제야 포인트 적립을 말씀하시는 ‘사후 적립’ 아줌마…. 작명의 상상력은 갈수록 늘어난다.

때로 손님과 맺은 어떤 사연이 별명이 된다. 폐지 모으는 할아버지는 맨발로 막걸리를 사러 오시곤 했는데 그래서 우리끼리는 ‘맨발 할아버지’로 통했다. 밤늦은 시간에 술 드시고 찾아와 혼자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하시는 중년 아저씨가 계셨는데, 어떤 재벌그룹 회장님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계신다나 뭐라나. 그분의 별명은 역시 ‘비자금’ 되시겠다. 그렇게 큰돈을 관리하신다면서 늘 껌 한 통만 사셨다.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카운터에서 책을 읽곤 하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이 쉬이 그려지지 않으면 손님에게서 힌트를 얻는다. 그리하여 손님 가운데 미도리와 나오코가 탄생했고(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등장인물), 그레고리 잠자와 브리오니의 외모도 ‘대체로 이런 모습이겠군’ 상상할 수 있었다(각각 프란츠 카프카 ‘변신’, 이언 매큐언 ‘속죄’ 등장인물). 그레고리 잠자는 엊그제 저녁에 음료수를 사 갔고(물론 벌레로 변신하진 않았다), 미도리와 나오코는 소설과 다르게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언니, 오늘은 내가 낼게”하고 귀여운 경쟁을 벌인다. 지금 읽는 소설에 나오는 상수(김금희 ‘경애의 마음’ 등장인물)는 방금 다녀간 넥타이 손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작년에 펴낸 수필집에 슬쩍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책을 읽은 손님이 “거기 나오는 ‘치킨도시락’이 혹시 저 아니에요?”하고 묻더라. 소이부답(笑而不答)-웃으며 상황을 모면했지만 이제야 고백하오니 “네, 손님이 맞습니다”. 오늘 칼럼을 보고 찾아올 스머프, 위아래, 비자금 등에게도 미리 말씀드리오니, “네, 당신이 맞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느 편의점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계실지 모른다. 전국의 수많은 ‘작명가’들에게 갈채를! 이거 원, 오늘은 편의점의 비밀을 너무 알려드렸다.

봉달호(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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