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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중도층을 너무 우습게 봤다

입력 2019-09-23 04:05:01


조국 임명과 여당의 전략은 정의·공정을 배반 당한 중도층 분노를 가벼이 본 것
중도층 진화하고 정치 분별력 높아져 진영 논리로는 안 통해
문제해결 능력도 부족한 여권 돌아선 이들 붙잡을 동력 없어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하면서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중도층을 주머니 속 공기돌처럼 다루기 쉬운 상대로 생각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중도층을 우습게 봤다. 대통령이 막판에 상당히 고민을 했고,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밀리면 총선이고 뭐고 없다는 식의 강력한 압박을 했으며, 임명하지 않을 경우 여권 내부의 정치적 충돌 가능성 등의 요인이 작용했다고 한다. 청와대 일각에서, 총리나 몇몇 외부인사들도 임명 강행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건의했으나 386 정치권력이 잡고 있는 당이 세게 밀어부쳤다는 얘기가 많다. 그랬든, 대통령이 애초 지명 철회 의사가 없었든 상관없다. 정치는 책임이니 결과도 오롯이 대통령의 책임이다.

대통령이 오판했다고 보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지명 철회에 따른 핵심지지층 이탈과 임명 강행에 따른 중도층의 지지 철회라는 상반된 두 가지 정치적 손해를 산정하는데 있어 전략적 극단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행위를 선택했다. 지지층만 안고 가는 정치전략이다. 핵심지지층 이탈의 경우 복귀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내년 총선까지 복원할 수 없고, 지지층 결집도가 현저히 약화될 것이며, 진영 싸움에서 절대무기인 조직이 위축돼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것 등이 이유였을 것이다. 진보 진영이 소수파일 때, 거대 보수권력에 포위돼 죽기 아니면 살기였을 때 쓰던 방식이다. 정의, 공정 같은 명분으로 국민적 의분을 유발해 지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과 여당이 다수 여론에 반하는 결정했으니 명분도 없고 의분은커녕 반발만 더 커졌다. 지난주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지지율 40%(한국갤럽)는 취임후 최저치이자 대선득표율(41.1%)을 깨트렸고, 부정 평가 54%는 취임 후 최고치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중도층 이반이 시작된 것이다.

둘째 중도층이 수긍할 가시적인 개혁 성과가 없다. 이른바 386정권의 무능력과 직결되는 항목으로 대통령과 여권으로서는 참 아픈 지점이다. 그래도 우리가 사회를, 역사를 이만큼 진전시켰다고 주장할 만한 게 없다. 무능하다는 것은 조국 임명으로 문재인정부 지지를 철회했거나 철회하려는 중도층을 다시 붙잡을 동력이 현저히 약해졌다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양쪽 묻지마 지지층 말고, 중도 진보나 중도 보수층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능력, 특히 문제해결 능력이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적폐다 하는 지적은 많았는데 해결해 놓은 것은 없다. 그런데도 대선 때 지지해준 중도층이 결국은 돌아올 것이라고 봤다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다. 돌아선 중도층을 다시 잡을 만한 자신있는 구심력은 현재로선 없다. 웰빙 보수정치를 궤멸시킨 중도층의 분노를 너무 가벼이 보고 있다.

셋째, 검찰 수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았다. 정치가 생물이라지만 수사도 생물이다. 일단 수사를 시작했으면 위법한 뭐라도 하나 건지려는 게 검찰의 본성이다. 이걸 개혁 저항이라는 이분법 프레임으로 엮는 건 너무 유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거다. 수사에 참여하는 젊은 특수부 검사들이 옷벗을 각오하고 사모펀드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한 말도 있으니 ‘검찰은 검찰의 일을 한다’며 수사한다는데 뭐가 잘못됐나. 조국 임명 목적이 오로지 검찰 개혁인데, 오히려 걸림돌이 돼 버렸다. 촛불 시위가 시작됐을 때부터 개혁에 지지를 보내준 중도층은 대통령의 선택, 개혁 전략, 문제해결 능력에 심각한 회의가 들지 않을까.

어차피 임명은 했으니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국 임명에 여권 내부에서는 불만도 있다. 하지만 그걸 외부에 발설할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니 일치단결, 강철대오, 총선승리 구호만 외칠 것이다. 이해찬 대표의 “정권 재창출이 역사적 소임”이나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중요한 건 순간의 여론조사나 여론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결단력”이라는 언급은 내부 경고 겸 진영 논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게 정치”(카를 슈미트)이므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 우리편의 가치체계가 확고해지고, 적의 존재를 부각해 “피흘리지 않는 전쟁인 정치”(마오쩌둥)로 매진하자는 것이겠다. 여기에 중도층은 없다. 중도층을 향해 “니들이 가봐야 어딜 가니”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1980, 90년대 정치 구도가 명확할 때나 유용한 전략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미 균등, 공정, 정의라는 명분은 조국 사태로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

중도층은 정치 격변을 거치면서 진화하고 있고, 사안을 보는 분별력도 높아졌다. 보수든 진보든 진영 논리나 선동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문제해결 능력인데 찌든 옛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발생시킨 당시에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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