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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정건희] 경우의 수

입력 2019-09-30 04:10:01


말 그대로 ‘역대급’ 우승경쟁이다. 5월 30일부터 121일간 KBO리그 프로야구 단독 1위를 달리던 SK와이번스는 28일 삼성라이온스에 7대 9로 덜미를 잡혔다. 반면 2위 두산베어스는 같은 날 한화이글스에 7대 6 승리를 거뒀다. 양 팀은 86승 1무 55패로 승률까지 똑같은 공동 1위. 하지만 동률 시 상대전적, 득실차 우위를 따르는 규정상 9승 7패로 맞대결 전적에서 앞서는 두산이 SK가 가지고 있던 매직넘버 ‘2’를 넘겨받아 자력우승이 가능한 실질적 1위에 올랐다.

재밌는 건 84승 1무 57패로 3위에 자리한 키움히어로스도 ‘산술적’으로 아직 우승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상위 세 팀 모두 2경기씩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키움이 마지막 경기까지 모두 이기고 1, 2위 팀이 잔여 경기를 모두 패할 경우 세 팀은 모두 승률 0.601로 동률이 된다. 이럴 경우 두산에는 상대전적이 앞서고, SK와는 상대전적이 동률이지만 득실차에서 앞서는 키움이 최종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자칫하면 사상 최초로 시즌 최종일에 1, 2, 3위가 모두 바뀔 수 있는 상황이지만 확실한 건 세 팀 다 이기고 봐야 한다는 거다. 한 달 전만 해도 1, 2위는 9게임 차, 사실상 우승팀은 정해졌다고들 했지만 이젠 경우의 수를 두고 머리를 싸매던 고민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이처럼 예상 못한 전개가 왕왕 펼쳐지기에 우리는 스포츠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한데 그 층위가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정치와 정책으로 넘어가면 각본 없는 드라마가 반갑지만은 않다. 현 정부의 국정운영, 특히 부동산 정책과 시장 변화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다. ‘가격 상승은 투기’라는 단호한 관점에 비해 실상 너무 좌고우면했고, 경우의 수조차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10월 시행을 앞두고 있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만 봐도 그렇다. 지난달 국토교통부가 상한제 시행을 공언했을 때만 해도 정부는 재건축 시장 과열과 서울 아파트값 상승곡선이 금방이라도 잡힐 듯 여겼다. 하지만 발표 후 정책효과에 대해 당·정 이견이 표출되고, 시장이 정책에 선행 대응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신축아파트가 재건축 대신 오르고, 구축아파트가 신축을 따라가는 ‘갭메우기’에 시세가 들썩이더니 결국 재건축 시장도 기세를 회복했다. 적용 시점과 효과 등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동안 시장은 과거 경험과 시세 반등 가능성에 무게를 둔 채 ‘마이웨이’로 내닫고 있다.

경우를 얘기하다 보니 한 사람이 떠오른다. 최근 온라인에서 최고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2003년작 영화 ‘타짜’의 등장인물 곽철용. 김응수씨가 연기한 깡패두목 곽철용은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이 안에 배신자가 있다. 이게 내 결론이다” “어이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등 혜안이 번뜩이는 대사가 재조명받으며 요즘 젊은 친구들 사이 ‘인기 역주행’이 한창이다. 시의적절한 상황판단과 과감한 결단력에 인간미까지 갖춰 ‘현자’로 컬트적 추앙을 받는 그는 경우와 관련해서도 한마디를 남겼다.

“경우라. 막말로 세상에 경우란 경우는 우리가 다 어기고 살지만 너하고 난 경우 따져야지. 근데 본래 그건 내 돈 아니냐? 이 경우는 원래 쇼당이 안 붙지.”

‘쇼당’은 고스톱에서 한 사람이 가진 마지막 화투짝 2장이 각각 다른 두 사람의 점수를 나게 하는 경우, 본인의 패를 공개하고 무엇을 낼지 묻는 일을 말한다. 지금 정부의 움직임을 대입해보면 상한제를 한 손에 쥐고 시세 안정과 자산가치를 볼모로 사실상 쇼당을 보려 하고 있는 셈 아닌가. 정작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투기세력보다는 생존의 관점에서 주거문제에 없는 자산을 털어 넣어야 하는 실수요자들인데 말이다.

애초에 주택시장에 발 담근(유주택자) 사람도, 담글까 말까 고민하는(무주택자) 사람도 연속성 없는 정책효과에 ‘밑져야 본전’인 상황에서 시행된다 한들 정책 목적이 달성될지도 의문이다.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부자들 절반 이상이 장기 유망 투자처로 부동산을 꼽고(29일 KB금융 경영연구소 조사), 반포 아크로리버파크가 평당 1억원에 거래되는 현실을 직시해보면 곽 선생 말대로 이 경우는 쇼당이 안 붙을 텐데. 외려 공급 축소와 함께 ‘좁고 높은 문’이 된 로또 청약시장을 바라보며 현금부자들은 그의 또 다른 명대사를 주억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묻고 더블로 가!”

정건희 산업부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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