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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장지영] 도밍고와 오페라의 위기

입력 2019-10-02 04:05:01


최근 세계 공연예술계의 최대 이슈는 단연 오페라계 슈퍼스타 플라시도 도밍고(78)를 둘러싼 ‘미투 고발’ 파문이다. AP통신이 지난 8월 12일 피해자 9명에 대한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도밍고의 콘서트를 바로 취소했다. 그리고 도밍고가 총감독을 맡고 있는 LA오페라는 “외부 인력을 고용해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을 조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은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도밍고의 공연을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2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도밍고가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유럽 공연계의 정서를 보여준다. LA오페라의 조사 역시 지지부진하던 상황에서 AP통신은 9월 5일 또 다른 피해자 11명의 사례를 추가로 보도했다. 이후 미국 댈러스 오페라가 도밍고의 공연을 취소한 데 이어 8일 미국 오페라노조가 자체 조사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다시 바뀌었다. 특히 세계 오페라계의 중심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가 24일 도밍고의 출연을 철회한 것은 상징적이다. 당초 피터 갤브 MET 총감독은 25일부터 공연될 예정이었던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의 주인공으로 도밍고를 고집했다. 도밍고 역시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에 참여했다. 하지만 도밍고의 출연에 대한 MET 단원들의 자괴감과 불만을 보도한 미국 공영방송 NPR의 뉴스가 큰 파장을 일으키자 결국 마음을 바꿨다.

MET의 결정으로 도밍고의 입지는 좁아지게 됐다. 그동안 도밍고를 감싸던 유럽 오페라극장과 페스티벌, 스타 성악가들도 이제는 입을 다물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언제쯤 발표될지 미정이지만 다들 LA오페라와 미국 오페라노조의 조사결과가 나와야만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을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부르는데도 오페라계가 도밍고를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의 티켓파워 때문이다. 그는 오페라극장을 언제나 관객으로 가득 채우는 최고의 ‘캐시카우’다. 지난 2017년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경우 영화계에서 그를 대체할 인물은 많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페라계에서 성악가, 지휘자, 행정가, 콩쿠르 창설자인 도밍고의 위상과 영향력을 대체할 인물은 없어 보인다. 또한 도밍고 사태는 현재 오페라 생태계가 얼마나 허약한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공연예술은 영화와 달리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규격화가 어렵고 생산성을 높이기 어려워 만성적인 적자에 빠지기 쉽다. 특히 오페라는 작품 한 편당 소요되는 제작비가 높은데다 장기공연이 어려워 티켓값을 낮추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연예술 중에서도 가장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MET는 2007년부터 공연 실황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오페라의 유통 플랫폼에 변화를 꾀했다. 많은 관객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극장에 실제로 오는 관객이 줄어드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는 악화된 재정 상황 탓에 외부 출연자에 대한 개런티를 1년 이상 지난 뒤에 보내주는 오페라극장이 허다하다. 이렇다 보니 해외 오페라계 곳곳에서 오페라극장의 파업 소식이 들린다. 적자 누적이 계속된 오페라극장이 결국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나서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시카고 리릭오페라는 노조의 양보로 5일 만에 타협을 했지만 올해 북아일랜드 그랜드오페라는 120명 해고 위기에 노조가 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게다가 오페라의 가부장적인 가치관과 감상적인 스토리는 젊은 층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충성도 높던 노년층의 고령화로 관객 감소가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오페라계의 절대절명의 과제다. 이 때문에 젊은 관객을 개발하고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 뮤지컬을 공연하는 오페라하우스 또는 오페라단이 부쩍 늘어났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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