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어릴 적부터 신앙의 깊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와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 전부터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지만 자녀에게 강요하진 않으셨다. 대신 교회에서 심방을 오면 늘 대문을 열었다. 나 역시 집에 온 교회 사람들이 찬송하면 따라 불렀고 같이 기도했다. 그때 기억이 지금 내 신앙의 뿌리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임에도 엔지니어 기질만큼은 확실히 드러냈다. 손재주도 있고 만드는 걸 좋아하니 작동이 잘 되는 라디오를 뜯어 재조립하고 부엌에 있는 그릇과 집기들을 조합해 물건을 만들면서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증명하지 않으면 늘 의심했다. 중학생 땐 전도하러 집에 온 고등학생 형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며 증거를 요청했다. 당돌한 중학생 아이의 질문에 당황하던 그 형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봐서 공직의 길에 들어가기를 바라셨다. 엔지니어 기질만큼 강했던 게 자기 소신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은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중대한 결심을 했다. 공업고등학교 입학이었다.
공고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제도와 운에 내 인생을 맡기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중3이던 1973년 7월 정부는 학교 평준화를 하겠다며 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입시 제도를 지역별 추첨으로 변경하고 즉시 적용했다. 일명 ‘뺑뺑이’였다. 두 번째 이유는 공고에 들어가 공대에 들어가는 걸 도전해 보고 싶었다.
나의 선택에 부모는 물론 학교도 말렸다. 당시 공고는 대학 진학보다 취업이 우선이었다. 성적이 꽤 괜찮았으니 다들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용산공고에 입학해 실습교육을 충실히 받으며 입시 준비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다. 공고를 포함한 실업계 학생들도 대학에 갈 수 있게 정부가 대입 제도를 바꾼다는 얘기였다. 공고를 졸업했고 내신이 상위 30% 이내면 본고사 없이 예비고사만 보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대입을 준비하던 터라 내신도, 예비고사 성적도 좋았다. 서울대 공과대학에 원서를 들이밀었더니 덜컥 합격했다.
‘난 재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본고사를 보지 않은 데 대한 미안함, 찜찜함이 공존했다.
대학 졸업할 즈음 찜찜함을 해소할 길을 찾았다. 대입 때 못 봤던 본고사를 대신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진학시험을 봤고 붙었다. 과학원에 들어갈 때는 LG 장학금을 받았다. 이때부터 LG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인간은 영적 존재다. 영에는 정체성, 성격도 포함되는데 나는 인간의 영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스마트폰에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도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나 iOS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나의 OS는 책임감인 것 같다.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책임감 말이다. 과학원에 입학하면서 공고 진학 때 결심했던 목표와 도전을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