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중학교 해럴드 헨더슨 교장은 인격자이며 교육자였다. 가끔 교목을 대신해 설교 말씀을 전할 때도 있었다. 미국 록키산 기슭에 살던 어느 부부가 야생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집안에서 키우다 날려 보낸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독수리가 어느 정도 크자 산에 올라가 몇 번이고 날려 보냈지만, 새장에서 커서 자유할 줄 모르고 공중을 날다 다시 새장으로 돌아오더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늘 끝은 부부가 독수리를 날려 보내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로 맺었다.
헨더슨 교장은 이 설교를 통해 자유를 잃은 조선인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려 했던 것 같다. 실제 내겐 일제 강점기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 자유함을 갈구하라는 어떤 메시지 같았다.
나는 믿는 친구들 10여명과 신앙동지회를 조직했다. 주일날 새벽이면 헨더슨 교장 집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헨더슨 교장 집은 학교 맞은 편 동산에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주일 이른 새벽 동산을 오르내릴 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성경 속 겟세마네 동산과 감람산이 상상됐다. 그만큼 이 동산이 좋았다.
이 시절 일본당국은 매월 일정한 날에 대구의 모든 중학생을 달성공원에 있던 일본신사로 불러 신사참배를 시켰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조선장로교총회의 신사참배 수용 결의로 교단 산하 기독교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하거나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폐교를 피하거나 이렇게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헨더슨 교장은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다른 기독교 학교와는 달리 후자를 택했다. 이 때문에 헨더슨 교장은 다른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다.
헨더슨 교장이 이같이 결단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당시에 난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헨더슨 교장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수많은 재학생을 보호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는 날이면 행진 도중 골목길로 빠져 숨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에게 들켜서 “너희만 예수 잘 믿느냐”고 책망을 듣기도 했다. 부득이하게 신사참배 마당까지 가게 되면 1000명 넘는 학생들이 경례라는 호령에 맞춰 일제히 절을 할 때 나는 그냥 주저앉아 버리기도 했다. 일본 당국자는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일본 정부 내무성에서 관장하는 국가의식이라는 말로 조선교회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중학교 생활이 참으로 즐겁고 재밌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일종의 비애가 있었다. 나라 망한 백성의 신세가 서러웠다. 우리나라 땅에 일본인들은 주육을 즐기는 반면, 우리 동족이 굶주려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것이 슬펐다. 태극기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보지도 못했다. 무궁화가 조선의 국화라는 말은 들었으나 어찌해서 조선 민족이 그 꽃을 좋아해서 국화로 삼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