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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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5) 학과시험 붙었으나 대답하기 곤란한 면접관 질문에…

입력 2021-06-14 03:10:01
일제강점기 말엽 소나무에 V자형 상처를 내 송진을 채집하는 모습. 산림청 제공


5년의 중학교 시절은 내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었다. 매년 한 번씩 열린 신앙수양회에서 송창근 박사, 김재준 목사, 한경직 목사 등 당대 유명했던 믿음의 선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들을 보며 목사가 되겠단 꿈을 키웠다.

나는 1941년 4월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갔다. 바로 신학교로 가기보다 대학에서 좀 더 공부를 한 뒤 신학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 조선엔 대학이 많지 않았다. 난 여비만 마련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가며 계속 개가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일종의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구제(舊制) 도쿄제일고등학교 입시에 응했으나 떨어졌다. 재수를 결정하고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와 야간전문학교를 다니던 형을 만났지만 형 역시 내게 도움을 줄 형편은 되지 못했다. 형도 막노동 일을 하며 겨우 자기 학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난 형 소개로 막노동, 신문배달 일을 하며 입시학원 등록금을 벌었다. 신문 배달 구역이 큰 곳은 아침에 300가호 이상 배달해야 했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놓치고 지나가 버린 집으로부터는 주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인들은 자기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 보도를 몹시 기다렸다. 특히 41년 12월 8일 새벽 미명에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섬의 진주만을 폭격한 뒤에는 그 관심이 더했다.

나는 이듬해 입시 때 센다이에 있는 제2고등학교에 응시했다. 학과시험엔 붙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관들은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하나는 ‘계성중학교 미국인 교장이 평소에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거였다. 이 당시 일본인이 가장 미워한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평소 우리에게 인격자가 되라고 가르쳤다”고 답했다.

다른 질문은 ‘조선총독의 내선일체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난 아직 나이가 어려서 정치 문제를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들이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나는 1년만 더 고생할 각오를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도 또다시 낙방했다.

결국 43년 초여름 일본에서의 재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진해에서 밀양으로 이사해 농사일을 하고 계셨다. 난 어머니 일을 거들며 시간을 보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며 인적 물적 할 것 없이 모든 걸 공출해 갔다. 밀양은 알아주는 곡창지대였지만,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서 거둬들인 대부분의 곡식을 일본정부에 내놔야 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쓰는 놋그릇, 제기, 놋쇠 요강까지 가져갔다. 심지어 교회 종까지도 가져갔다. 이렇게 가져간 놋쇠를 녹여 총탄을 비롯한 무기 생산에 사용했다. 일본이 저장한 기름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 소나무 마디를 따는데 동원됐다. 소나무 마디에서 진을 채취하기 위해서 였다. 일제는 소나무 진을 휘발유 대용 기름으로 짜서 썼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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