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재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 지원을 강요당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 땅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동남아로 끌려갔다. 내가 만일 일본에서 어느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학병으로 어느 곳인가로 끌려갔을 것이고, 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나 역시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1월 징용명령서를 받았다. 마을 내 24세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는 소위 횡단 징용이었다.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 마을 동갑내기들이 밀양 군청 청사 앞에 소집됐다. 군청 관리자는 나를 대장으로 임명했다. 내 대원은 50명에 가까웠다. 나는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됐다.
우리는 일본에 가기 전 황해도 겸이포에 있는 한 군수공장에서 2주간 예비훈련을 받았다. 이때 북한식 밥을 처음 먹었다. 이후 우리 일행은 겸이포를 떠나서 일본 가와사키 군수공장으로 이송됐다. 이송 중간에 우리가 탄 열차가 밀양역에 머물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일행 부모와 가족, 친구들이 역까지 나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만남이었다. 어머니도 나와 계셨다. 할 말이 막혀 나오지 않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가 가와사키 야금 공장에 당도한 때는 3월 초순이었다. 여기서 우리보다 앞서 이 공장에 징용돼온 밀양 출신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들의 근로 성적이 우수해 다시 밀양 청년들을 붙들어 왔단 말을 들었다.
한 달 정도의 적응 준비기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인 3월 중순 어느 날 저녁 미군 비행기가 가와사키와 인접한 도쿄의 시나가와 일대 공장 지대를 맹렬히 폭격하고 사라졌다. 도쿄대공습이었다.
폭격에 사용된 미군기는 B29라는 최신 비행기였다. B29는 유유히 떠다니면서 여기저기 소이탄과 폭탄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이 지역 일본인 가옥들은 거의 다 목재로 지어진 것이어서 소이탄만으로도 불태울 수 있었다. 폭탄은 땅에 큰 웅덩이를 파 놨다. 일본 군인들은 공장 부근해 비치해 뒀던 고사포를 이용해 전투기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B29가 너무 높이 떠 있어서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온 도시가 마치 화장터 같았다. 불타오르는 화염과 그 열기를 피할 길이 없었다. 나와 동료들은 기숙사 옆에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갔으나 너무 뜨거워서 바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기를 피해 인근 강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그곳도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강물도 차지 않았다.
우린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랐던 난 길가에 있던 토관 속에 들어가 있었다. 고막을 찢을듯한 굉음과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한동안 계속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폭격이 그쳐서 나와 보니 집들을 태우면서 타오르는 불꽃이 어두운 시가를 밝히고 있었다. 불탄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고 곳곳에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악취 또한 심해서 코를 막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