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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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7) 굶주림과 밤마다 폭격 있을 거란 소문에 공장서 탈출

입력 2021-06-16 03:10:01
일본 도쿄 시민들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다. 출처 Japan’s Longest Day


가와사키와 시나가와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됐다. 폭격으로 공장의 변전소가 불탔고 식당도 반파돼 공장 기능이 마비됐다. 난 공장으로 돌아갔다. 흩어졌던 동료들도 며칠 지나자 하나 둘 공장으로 돌아왔다.

폭격 이후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식량은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B29 폭격이 밤마다 있을 거란 소문이었다. 우린 밤이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공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안심되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난 여기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10명 가까운 밀양 친구들이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다. 우린 몰래 요코하마행 전차를 탔다. 그리고 도츠카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내가 일본에서 재수 생활을 할 때 형을 따라 막노동 일을 했던 곳이었다. 아직 내가 알 만한 조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조선으로 간 줄 알았던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했다.

도츠카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지내는데 형의 친구 한 분을 만났다. 미군 공습을 피해 도쿄에서 가족을 데리고 피난 온 것이었다. 도쿄시는 주민들이 어디든지 무료로 승차해서 떠날 수 있도록 이재민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는데 이분은 그걸 넉넉히 갖고 있었다. 이 증명서는 백지 증명서로 동회장의 직인만 찍혀 있었다. 나와 함께 온 밀양 친구들은 그 백지 증명서에 이름을 적어 넣고 밀양까지 무료로 갔다.

그러나 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징용에서 도망친 사실이 언제 밝혀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집에 폐만 끼칠 것 같았다. 난 도츠카 우체국에 가서 형에게 내가 이곳에 왔다고만 전보를 쳤다. 그리고 다시 야마가다현 어느 산골 마을로 피신했다. 도츠카 역시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약 저장소가 있었고 인근 지역이 다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공습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었다.

난 깊은 산골짜기 농가에 일꾼으로 들어가 4개월 넘게 숨어 지냈다. 8월 중순이 가까워졌을 때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머지않아 정부의 중대한 방송이 있을 거란 내용이었다. 마침내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에서 이 방송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주인집 가족들의 태도는 태연해 보였다. 아마 이미 일본의 패전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소식을 그들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태도 변화 없이 계속 일을 해나갔다. 물론 조만간 이 산골짜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깊은 산이라 그런지 10월 말이 되니 벌써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떠나야 하는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을 때 조선인연맹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 거류민들은 종전 후 조선인들의 신변 안전과 권익 보호를 위해 조선인연맹을 각 지방 단위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재수생 시절 알고 지내던 분이 내가 여기 있음을 알고 요네자와시 조선인연맹 사무소에 소개해 준 것이다. 난 여기서 사무를 봤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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