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사키와 시나가와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됐다. 폭격으로 공장의 변전소가 불탔고 식당도 반파돼 공장 기능이 마비됐다. 난 공장으로 돌아갔다. 흩어졌던 동료들도 며칠 지나자 하나 둘 공장으로 돌아왔다.
폭격 이후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식량은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B29 폭격이 밤마다 있을 거란 소문이었다. 우린 밤이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공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안심되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난 여기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10명 가까운 밀양 친구들이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다. 우린 몰래 요코하마행 전차를 탔다. 그리고 도츠카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내가 일본에서 재수 생활을 할 때 형을 따라 막노동 일을 했던 곳이었다. 아직 내가 알 만한 조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조선으로 간 줄 알았던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했다.
도츠카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지내는데 형의 친구 한 분을 만났다. 미군 공습을 피해 도쿄에서 가족을 데리고 피난 온 것이었다. 도쿄시는 주민들이 어디든지 무료로 승차해서 떠날 수 있도록 이재민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는데 이분은 그걸 넉넉히 갖고 있었다. 이 증명서는 백지 증명서로 동회장의 직인만 찍혀 있었다. 나와 함께 온 밀양 친구들은 그 백지 증명서에 이름을 적어 넣고 밀양까지 무료로 갔다.
그러나 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징용에서 도망친 사실이 언제 밝혀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집에 폐만 끼칠 것 같았다. 난 도츠카 우체국에 가서 형에게 내가 이곳에 왔다고만 전보를 쳤다. 그리고 다시 야마가다현 어느 산골 마을로 피신했다. 도츠카 역시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약 저장소가 있었고 인근 지역이 다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공습 위험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었다.
난 깊은 산골짜기 농가에 일꾼으로 들어가 4개월 넘게 숨어 지냈다. 8월 중순이 가까워졌을 때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머지않아 정부의 중대한 방송이 있을 거란 내용이었다. 마침내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에서 이 방송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주인집 가족들의 태도는 태연해 보였다. 아마 이미 일본의 패전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소식을 그들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태도 변화 없이 계속 일을 해나갔다. 물론 조만간 이 산골짜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깊은 산이라 그런지 10월 말이 되니 벌써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떠나야 하는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을 때 조선인연맹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 거류민들은 종전 후 조선인들의 신변 안전과 권익 보호를 위해 조선인연맹을 각 지방 단위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재수생 시절 알고 지내던 분이 내가 여기 있음을 알고 요네자와시 조선인연맹 사무소에 소개해 준 것이다. 난 여기서 사무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