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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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8) 징용 끌려가 사지를 헤매다 그리웠던 어머니 품으로

입력 2021-06-17 03:10:01
해방직후 일본 야마가다현의 조선인 아이들. 이장식 교수는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에 취직해 이들의 명부 작성하는 일을 했다. 출처 블로그(gen4n) 캡처


초기 조선인연맹은 좌우 색깔 없이 순수하게 일본 내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뒀다. 나는 요네자와 지부에서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로 전근됐다. 교포들의 명부를 작성해 그들의 실정을 살피는 게 내 일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짖고 자랑하던 ‘야마토 다마사이’(일본 혼)라는 말도 쏙 들어갔다. 조선과 만주, 대만에서 높은 벼슬을 갖고 식민지 백성을 부리던 고위 관리를 비롯해 많은 재산을 갖고 살던 이들이 빈손으로 귀환했다. 일본 정치는 맥아더 장군의 군정에 맡겨졌다. 처참한 패전국 일본에 살고 있던 많은 조선 교민은 반대로 힘이 나서 가슴을 펴고 다녔다. 더러는 큰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일본 전국 지방마다 조직된 조선인연맹은 1945년 12월 마지막 날 전국적인 총연맹의 창립총회를 도쿄 조선총독부 출장소 건물에서 열었다. 나는 야마가다 지부 총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총회에 참석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총대들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노동이나 사업을 한 사람들이어서 서로가 잘 알았다.

이 창립총회에서는 먼저 임원 선출을 해야 했는데, 좌·우익으로 나눠진 대의원들 사이에서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다. 발언 소리가 높아지고 양 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회의는 진전이 없었다. 총대들은 밤늦도록 싸워댔다. 그것도 모자라 숙소에 가서도 계속 싸웠다. 난 어떤 싸움인지 모르기도 했지만 흥미도 없었다. 그저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고도 한민족이 이렇게 다투는 게 애석하기도 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창립총회에서 또 하나 신기했던 건 총회 둘째 날 열린 공연이었다. 그날은 새해 정월 초하루였는데 북한에서 파견된 교포 위문 공연단이 도쿄의 시부야 극장에서 공연하기로 돼 있었다. 총대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모두 공연을 보러 갔다. 나도 그 공연을 봤다. 이처럼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 앞서서 재일교포 포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재일교포 중에 많은 지도 인사와 재력가들이 친북파가 됐다. 결국엔 조선인연맹을 친북파가 장악하게 됐다.

난 징용으로 끌려와 사지를 헤매다 살아남은 터라 일본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날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 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조선인연맹 초창기 일을 도운 것은 내게 귀중한 경험이었지만 그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 우편 통신이 없었던 때라 나는 귀국 날을 미리 알리지도 못하고 3월 초순 밀양 집으로 돌아왔다. 조국에 돌아와 보니 광복의 기쁨과 감격이 방방곡곡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어머니는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해방된 날부터 내 귀가를 기다리셨다고 한다. 해거름 때가 되면 집밖에 나오셔서 아들이 오는지 보다가 그저 집으로 돌아가길 반복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로가 돼 원수의 나라에 잡혀갔던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게 된 건 꿈 같은 일이었다.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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