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세력을 부리던 일본인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미소나 수리조합, 면사무소 등 기관이 다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와 있었다.
다만 치안은 어수선했다. 지방별로 자치적인 민간단체가 생겨서 치안을 챙겼지만, 교육도 훈련도 받지 않은 마을 청년이 치안대원이랍시고 모인 게 다였다. 이들이 총을 들고 행인들을 검문할 때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총칼에 의지한 채 으스댈 뿐이었다. 그들이 잡으려는 게 도둑인지 좌익인지 분간이 안 갔다. 일본에서의 좌·우익 대립이 남한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귀국 후 나는 먼저 대구로 가서 계성학교의 신태식 선생님을 만났다. 신 선생님은 일제에 빼앗긴 계성학교를 다시 찾아온 당사자로 당시 계성학교 교장이 돼서 학교의 면목과 위상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신 선생님은 아무런 계획이 없던 내게 계성학교에 와서 국어를 가르치라고 했다.
나는 국어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계성학교 시절 우리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쓸 줄은 몰랐다. 신 선생님은 그런 내게 “어려울 것 없으니 밀양 집에 가서 한글 맞춤법을 2주간 공부하고 오라”고 했다. 맞춤법 책 한 권도 선물로 받았다.
1946년 9월 나는 모교 계성의 국어교사가 됐다. 이때 계성학교에는 나를 포함해 국어교사가 3명이었다. 한 분은 계성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시인으로 이름나 있던 박목월 선생님이었다. 박 선생님은 나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주기도 한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다른 한분도 국어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국어를 배우면서 가르쳤고 또 가르치면서 배웠다. 이때 배운 우리말 철자법과 문법은 후일 내 저술 생활에 큰 도움을 줬다.
영남 일대에서도 좌·우익 세력의 충돌이 심상치 않게 일어났다. 대구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계성학교는 우익세력의 보루처럼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변도 많이 당했다. 한번은 계성학교가 대구 지역 체육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해 시내 행진을 하는데 좌익세력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나도 머리를 다쳐서 인근 동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이튿날부터 환자가 계속 들어왔다. 중상을 입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날 대구에서 10·1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좌익들이 밤에 경북지방 시골에서 경찰서와 군청, 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경관을 비롯한 기관원, 우익 인사들을 죽이고 방화한 처참한 사건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에 대한 조직적인 진압 작업이 시작되자 좌익들은 지리산을 비롯해 각처의 심산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산속에 은신해 있다가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경찰서를 습격하거나 민가에 가서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빼앗아갔다. 산악지대 민가 사람들은 낮에는 경찰에 협력하고, 밤에는 좌익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생활을 하면서 곤욕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