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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11) 송창근·김재준·한경직… 신학대서 세 분의 참스승 만나

입력 2021-06-22 03:10:01
1947년 당시 서울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전경. 국민일보DB


조선신학대학(이후 한국신학대학, 현 한신대)을 다니면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을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세 분은 교실에서 강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목회를 통해서도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송 박사님은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를 신학교 교정에 세웠다. 그는 재래의 한국교회 예배 의식을 혁신했는데 목회기도를 장로들이 맡아 드리던 통례를 버리고 목사가 드리게 했다. 설교와 기도 시간 길이도 제한했다. 예배가 1시간 정도면 끝났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찬양대 역할 또한 크게 활성화 시켰다.

김 목사님은 장충동에 성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를 세웠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회중은 주로 대학생과 청년들이었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강의 같았다. 조용하게 진리를 풀어나가며 재래신앙과 경건의 폐단, 특히 보수신학과 보수신앙을 시정하는 진보적인 설교였다. 난 이 교회에 자주 나갔다. 한동안은 찬양대원을 하기도 했다.

한 목사님은 저동에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과거 목회했던 신의주교회의 월남 신자들이 많았다. 한 목사님의 대중적 설교는 우리 신학생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그의 목회자적 경건성이 주는 감화력도 매우 컸다.

내가 이 신학대학에 입학(9월 말)하기 전인 1947년 4월 한국교회사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 조선신학대학 학생 51명이 김 교수님의 구약학 강의에 이의를 표명하고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교단에서는 김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는 장로교단 신학 논쟁의 분화구가 됐다.

사실 이런 논쟁은 예견된 일이었다. 조선신학교와 신학적인 면과 파벌적인 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해 벌어진 일이었다. 남북분단 와중에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신학교육기관은 조선신학교가 유일했고, 이로 인해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진정서를 제출했던 학생들은 역시 대부분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해방 뒤 월남한 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그해 5월 결국 제적됐는데, 이듬해인 48년 6월 조선신학교에 대항해 세워진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로 전학했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은 박형룡 박사님으로 김 교수님이 총회에 제출한 진술서에 대해 장로교 교리에 어긋난다며 부정적 결론을 내린 분이었다.

장로교계가 김 교수님 신학사상 문제로 몹시 시끄러워졌을 때 송 박사님은 물론이고 다른 교수들도 되도록 평화스럽게 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랐다. 나는 교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지방에서 김 교수님에 대해 흥분해 송 박사님을 찾아온 목사들을 여럿 봤다. 그때마다 송 박사님은 커피를 끓여 대접하면서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한 목사님도 48년 총회 때 발언권을 얻어 김 교수님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정치꾼들은 문제를 확대하려고만 애썼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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