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역경의 열매] 이장식 (14) 기독교를 정적으로 여긴 공산당… 목회자들 박해

입력 2021-06-25 03:05:03
한국전쟁 발발 다음 날 서울의 모습.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세를 관망하며 학교에 나오던 학생들도 점점 모습을 감췄다. 고향이 먼 학생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귀향길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몇몇은 내게 같이 남하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남았다. 피란 갈 노자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연로한 교수님과 동료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데 최연소자인 내가 살겠다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남침해 내려온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해 가는 동안 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반공주의자들로 치부하고 심하게 박해했다. 김일성은 기독교 세력을 정적으로 여겼다. 교회를 일종의 인민 착취 집단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정적을 살려두지 않았다. 이들은 혁명 단계에서는 더욱더 무자비한 정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은 인근 중학교 교사들 중에 공산주의 민청회원이 된 사람들이 우리 학교로 몰려 왔다. 신학교를 접수하란 명령을 받았다며 큼직한 김일성 사진을 교무실 벽에 걸었다. 그러고는 학교의 모든 열쇠를 빼앗고, 교수들을 쫓아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법천지가 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린 어디에 호소할 곳도, 또 힘도 없었다. 다만 송창근 박사님은 이런 일을 당하고만 계실 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셨는지 우린 그의 노력으로 학교를 도로 찾고 열쇠 뭉치도 돌려받게 됐다. 벽에 걸려 있던 김일성 사진도 떼어버렸다.

서울시 행정을 장악한 인민군 정치보위국은 날이 갈수록 목사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그들은 모든 목사가 자백서를 써서 공산주의와 인민군의 남침에 대해 소견을 피력하도록 했다. 인민군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기독교 집회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말세적인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념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는 인륜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해 좌익으로 분장한 사람도 있었고, 인민군 남침을 호기로 삼고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에게 보복 행위를 감행한 이들도 많았다. 좌익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인민군에 협력해 동민들을 괴롭혔다. 인민재판에 부쳐 죽게 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게 한 사례도 많았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서울은 공포와 적막의 죽은 도시가 돼 갔다. 식량난은 갈수록 심해져갔고 남쪽으로 피란 가는 사람들 또한 점점 늘어갔다.

서울 상공에 이따금 유엔군(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북한군 비행기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전쟁이 남한과 북한의 싸움인지, 미군과 북한군의 싸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한 정부는 국군이 수일 내로 서울을 탈환해서 올 것이니 안심하라는 무책임한 방송만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를 믿었다. 사람들은 날로 심해가는 미군 폭격만 잠시 피해 있으면 곧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 청운동에 있는 창의문 밖 세검정 계곡으로 몰려갔다. 나도 학교 가까이에 있던 하숙집이 불에 타 뛰쳐나와서 그리로 갔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