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뷰크의 우리 가족은 어느 길가의 집 2층을 얻어 입주했다. 아내는 자동차 면허를 쉽게 딴 다음 500달러를 주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우린 두뷰크의 장로교회에 다녔고, 아내는 친절한 교인들을 통해 쉽게 직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사이 아내는 여러 일을 했다. 첫 일자리는 꽃을 심고 키운 다음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임금이 적었다. 얼마간 이 일을 하다 아내는 맥도널드 공장 직공으로 채용됐다. 유학생 가족 비자라 정식 취직이 불가능하단 말에 우리 가족은 미국 영주권을 바로 신청했다. 이렇게 해서 아내는 정식으로 직업을 갖게 됐다. 공구 박스를 사서 날마다 공장에 출근했다.
아내의 노력 덕에 69년 9월 시작한 학위 공부를 71년 5월에 마칠 수 있었다. 아내는 가정과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시내에 있는 클라크대학 대학원 야간부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우리 가족은 미국 정착과 귀국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신청했던 영주권도 나왔고, 아내는 미국에 머물 경우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생계 걱정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 악화로 많은 근로자의 해고 소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아내도 이 여파로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난 한신대 복직을 당연시하고 한신대에 가족 귀국 여비 보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실망스러웠다. 가족 여비를 학교 돈으로 빌려주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부터 20년 동안 한신대와 인연을 갖고 온 사람에게 그리 큰돈이 아닌 여비의 이자를 물라는 것은 내겐 섭섭한 처사였다.
결국 난 한신대 복귀를 단념했다. 단지 여비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신대 이사회가 교수의 교내 사택 제도를 폐지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귀국하면 사택을 비우고 밖에 나가서 집을 얻어야 할 텐데 내겐 그렇게 할 만한 돈도 없었다. 퇴직금도 모두 가불해 쓴 처지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구 계명대로 행선지를 틀었다. 계명대는 내가 박사 공부를 마칠 무렵 학장으로 계시던 신태식 선생님 편으로 수차례 청빙 편지를 보내왔었다. 신 학장님은 미국장로교 선교부에 연락을 취해 우리 가족 여비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해 7월 하순 나는 한신대 수유리 신학교 사택으로 돌아와 대구로 갈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뵌 어머니는 고생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내가 박사가 돼 돌아온 것으로 속량 받은 듯이 기뻐하셨다.
계명대에서 나는 교수 겸 교목의 직책을 갖고 학생들의 채플 시간을 인도했다. 신 학장님은 내가 계명대에 부임한 지 1년도 안 돼서 교육대학원장과 부학장 직책을 맡겼다. 아내도 계명대 부속전문대학 보육과의 전임강사로서 유아교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 학장님은 보육과의 부설유치원 원장직을 아내에게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