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내려온 지 두 달만인 1971년 9월 29일 아침 어머니께서 76세의 나이로 그만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세수하고 부엌에 나와 아내 옆에서 말린 생선을 손보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방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왔으나 이미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 본인은 편하게 눈을 감으셨지만, 자식 된 내겐 너무 충격이 컸다. 나와 아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제 좀 편하게 모시려고 마음먹었는데, 자식의 소원도 부질없는 것이 됐다. 일찍이 남편과 장남이 세상을 떠난 후, 하나 남은 아들을 위해 수고만 하셨던 어머니였다. 이를 생각하면 슬픔이 더욱 깊어졌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면서 이북과의 체제적 대결을 위해 남한에 유신체제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인권 유린 사태가 빚어졌고 자유를 억압당하게 되자 대학생들의 항의와 시위가 연일 일어났다.
그러나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불렸던 박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인기는 좋았다. 한 번은 육 여사가 계명대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다. 육 여사는 큰 환영을 받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이때 계명대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대하겠다는 약속도 하셨다. 이 약속에 따라 나는 학생들을 인솔해 처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봤다.
당시 신태식 학장님은 계명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당시 문교부나 정부 당국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해왔다. 또한 학교 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그런데 75년 어느 가을날 일이 터졌다. 학생 채플 시간이 돼서 나가보니 채플실 문이 닫혀 있고 채플이 없다는 게시가 붙어 있었다. 이날은 대구 시내의 한 신부가 와서 설교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지 않도록 이미 연락이 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몰랐는데 신 학장님이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사연을 알아보니 내가 지도하던 ‘성빈회’라는 기독학생클럽 학생들이 이날 채플 시간을 이용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구국기도회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신 학장님은 이를 미리 막기 위해 채플을 폐쇄한 것이다.
신 학장님은 내가 그 학생들의 지도 교수였으므로 나 역시 학생들의 계획에 동조했거나 아니면 묵과한 것으로 짐작하고 계셨다. 신 학장님을 만나러 갔더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으나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신 학장님은 나를 불러 교목직의 해임을 언도하셨다. 성빈회 학생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었지만, 해임 사유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후에 나는 몇몇 교수로부터 평소 내가 채플 시간에 한 설교가 반정부적인 암시가 있어서 학생들을 자극했단 얘기도 들었다.
아무튼 이때 신 학장님의 나에 대한 기대가 아주 사라진 듯했다. 한마디 말씀도 없이 아내의 부속유치원 원장직 해임을 유치원 교사들에게 선언했다. 아내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무척 당혹해 했다.
결국 나는 4년 6개월의 계명대 생활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신대 이사회에서 다시 학교로 복귀해달란 요청이 있어서 우린 서울로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