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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28) 목회자 양성 위해 신학교 짓다 교단 재정 어려워져

입력 2021-07-15 03:05:03
이장식(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교수와 박동근(아랫줄 맨 왼쪽) 사모가 PCEA신학교 제자 및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 총회장 무인디 목사와 증경 총회장 키옹고 목사, 직전 총회장이면서 신학교 학장이던 완자우 박사 등을 1992년 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오찬을 즐기던 중 무인디 목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PCEA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고 싶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난 두 교단이 함께 협력하면 선이 되겠다 싶었다.

난 곧바로 무인디 목사의 말을 편지로 당시 기장 총회장인 김수배 목사에게 전했다. 기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기장 총회는 그해 9월 무인디 총회장을 정식으로 초청했고, PCEA는 아프리카 교회로서는 아시아 교회와 선교 동역자 관계를 맺은 최초의 교회가 됐다.

나와 아내의 케냐에서의 주된 사역은 목회자 양성이었다. 목회자가 크게 부족한 아프리카 땅에선 목회자 양산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재정이 빈약한 이 대륙에서는 자비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우리는 이 신학생들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때때로 작은 볼펜이라도 생기면 나눠 주거나, 학급별로 사진을 찍어서 나눠 주기도 했다. 졸업생들이 졸업 앨범은 고사하고 전체 사진 한 장도 갖지 않고 뿔뿔이 헤어지는 이 신학교에서, 아내는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재학생 및 교수들과 찍은 사진을 확대해 액자에 넣어 도서관에 걸어 놨다.

우리가 케냐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 PCEA 대학교 새 교사가 완공됐다. 우리가 왔을 때 골조 공사가 거의 끝났었는데, 교단 재정 사정으로 지연되면서 5년이 더 걸렸다. 이 신학교 건축으로 인해 학교 운영이 한동안 극도로 어려웠다. 신입생을 제대로 모집하지 못한 때가 두 번이나 있었고, 학교를 일시 문 닫아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나와 아내는 선교서신을 통해 한국교회에 이 딱한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한국의 교회들과 미국 교포 교회들로부터 장학금이 송금돼 왔다. 이렇게 10년간 우리를 통한 장학금 총액이 약 12만 달러나 됐다. 이 돈은 전액 신학교 회계 통장에 입금돼 학교 운영에 직접 사용됐다.

신학교가 있는 도고토에서 3㎞ 떨어진 곳에 다고레티 어린이집이 있었다. 지역 노회 목사들과 장로들이 운영위원들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정부의 도움은 별로 없고 순전히 교회와 사회 유지들의 원조로 운영해가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이 어린이집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 대구 동원교회가 보내준 선교 헌금 800여 달러로 젖소 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 돼지 세 마리를 사다 기부했다. 이 어린이집은 이런 가축을 키워서 운영상 도움을 얻고 있었다.

도고토 마을에는 신학교와 남녀고등학교, 초등학교 등이 있었지만 유치원은 없었다. 아내는 지역 키무리 교회 담임 크고 목사와 의논해서 유치원을 세우기로 했다. 기장 서울여신도회가 3년 동안 연 1500 달러씩 보내준 돈으로 시작했다. 예장 통합 측 순천 장로교회도 700달러의 건축비를 보탰다. 교실 세 개를 먼저 지어 원아 2개 반을 모집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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