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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유동부 (2)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정 폭력 피해 홀로 서울행

입력 2021-07-21 03:05:04
유동부 대표가 2003년 7월 강원도 춘천의 한 호텔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인 박순정씨와 아들 태정, 딸 은진씨. 태정씨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 제품개발생산팀장을 맡고 있다.


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다. 아버지께선 별다른 직장 없이 떠돌이 생활을 많이 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술도 술이지만, 방랑벽이 심하셨던 듯하다. 아버지는 집엔 자주 안 들어오셨지만, 이따금 집에 오시면 툭하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우리 삼 형제를 때리곤 하셨다. 그 탓에 남아나는 살림살이도 없었다. 폭력이 심할 때면 형을 거꾸로 매달고 때리거나, 집 앞 닭장에 날 묶어 놓고 때리던 때도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실 땐 동생과 난 이불 속에서 당시엔 잘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께 그저 어머니가 더 맞지 않게 해달라며 기도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있다. 어머니와 우리 삼 형제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순천, 전주, 임실, 조성 등 이름 모를 주변 소도시로 도망을 다녔다.

형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형과는 별다른 교류를 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난 동생과 함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머니께선 돈을 벌기 위해 따로 나가서 사셨다. 이따금 아버지가 우리 형제의 집을 찾아오실 때면 먹을 것이 없다는 우리에게 설탕 한 포만 덜렁 던져두고 가셨을 뿐이었다. 한창 맛있는 것을 먹고 자라도 모자랄 나이에 먹을 것이 없던 우린 오죽했으면 잠을 잘 때면 겨드랑이 옆으로 지나가는 쥐를 쫓을 힘조차 없었다. 그나마 당시 다니던 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우리가 불우한 가정환경 가운데 있다는 걸 아시곤 도움을 주셨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와는 뜨문뜨문 연락하면서 지냈고, 연락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다가 세월이 흘러 내 결혼을 앞두고 한 번 얼굴을 뵈었다. 그리곤 얼마 못 가 암에 걸리셨고, 결국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와서 아버지께서 왜 그러셨을지 이해해보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지나오신 탓도 있지 않았을까 지레짐작만 할 뿐이다. 그때 이후로 난 절대 내 자녀들에게 손찌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 난 학교를 그만뒀다. 곳곳을 전전하며 돌아다닌 탓에 학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먹고 사는 것조차 변변찮았던 내게 학업은 사치와 같았다. 난봉꾼인 아버지가 무서워 어디로든 피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겨울방학 때 어머니는 날 서울에 사시는 외삼촌 댁으로 보내셨다. 계속 아버지를 피해 도망만 다니면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때라 지방에 살던 사람 중엔 무작정 일자리를 알아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순천에서 홀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열여섯의 어린 소년은 그렇게 생활전선에 내던져졌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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